종교시설/사찰

■양주 회암사지.회암사지박물관(feat 반환사리 친견행사)

dogyein 2024. 6. 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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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회암사지박물관(feat 반환사리 친견행사)

※5월21일~6월9일 회암사지박물관 1층

●회암사는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天寶山)에 있는 고려후기 승려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를 본떠 건립한 사찰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회암사는 현재 있는 회암사가 아닌 그 입구에 있는 회암사지를 설명하고 있다.

 

●회암사자는 발견된 이후 발굴 작업등을 거쳐 현재 사적(128호,1964년 06월 10일 지정)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회암사가 일제때 사라졌던 사리를 최근 보스턴박물관으로부터 반환받음으로 인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5월 21일부터 6월9일까지 이어지는 사리 친견행사를 찾는 신도 및 일반인들이 줄을 잇고 있다. 회암사지에서 발굴작업을 통해 발굴된 유물들은 현재 그 옆에 건립된 회암사지박물관에 전시보관되어 있다.

 

●이 회암사는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로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일반적인 사찰과 달리 덕수궁이나 경복궁처럼 궁의 형태로 건립되었던 사찰이라 건축구조상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인도스님이었던 지공스님이 고려후기에 인도의 나란타사를 본떠 건립한 사찰이며 조계종 25교구 본사 봉선사의 말사다. 봉선사는 인근 15키로미터 위치에 있다.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이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우왕 4) 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

 

●그러나 지공이 창건하기 전에도 1174년(명종 4)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온 적이 있으며, 보우(普愚)가 1313년(충선왕 5)에 회암사에서 광지(廣智)에게 출가한 바 있어 이미 12세기에 존재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주는 알 수 없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의 승려 수는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로, 조선의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수도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효령대군(孝寧大君)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1424년(세종 6)의 기록을 보면 이 절에는 250명의 승려가 있었고, 경내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1472년(성종 3)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정현조(鄭顯祖)에게 명하여 중창하였으며,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 재흥정책을 펼 때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유신(儒臣)들에 의해 나라의 정책이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1565년(명종 20) 사월 초파일에 보우(普雨)가 잡혀 가고 절은 불태워짐으로써 폐허화되었다.

 

●1821년(순조 21) 지공 · 나옹 · 무학의 부도와 탑비가 고의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정에서 1828년에 다시 중수하였으며,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는 사호를 계승하였다. 1922년에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새로 보전을 짓고 불상을 봉안했으며 지공 · 나옹 · 무학의 진영을 모셨다.

 

●회암사지를 지나 그 뒤편 1키로 후방 산 속에 있는 회암사에는 이들 3명의 스님들 부도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안타까운건 이들 스님의 부도들이 도굴꾼들에 의해 도난당하거나 화재로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지금은 보물로 지정되거나 국가유산으로 보호되고 있다.

 

●1976년에는 호선(昊禪)이 큰 법당과 삼성각 · 영성각(影聖閣) 등을 중건하였다. 회암사의 정문이었던 일주문(一柱門)으로 들어서면 대웅전이 있었던 곳으로, 주춧돌의 수가 532개나 된다.

 

●이 법당터 옆에는 사찰의 화장실 자리가 있고, 오른편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석물(石物)이 남아 있는데, 길이 12자, 너비 9자, 두께 1자, 깊이 3자이며, 이 옆에는 역시 화강암으로 만든 맷돌과 기름틀이 있다. 또한 본당 뒤에는 사방 6자의 떡안반이 있다.

 

●일주문 옆으로 회암사지가 있으며, 사리탑과 당간지주. 괘불터 들만 회암사지에 건축물로 남아있다.

 

●회암사의 중요 문화재로는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1963년 지정)와 회암사지 무학대사탑(보물, 1963년 지정),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보물, 1963년 지정)이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로는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 무학대사비(경기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가 있다. 회암사지 사리탑은 197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보물로 승격 지정되었다.

 

●옛 절터는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 대규모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회암사는 조선 최대의 사찰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개국 공신 무학대사의 스토리가 방대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무학대사는 조선 유일의 국사라고 하며, 숭유억불 시기임에도 회암사는 왕가로부터 엄청난 지원을 받아 융성하였으며 임금이 자주 찾는 사찰이기도 했다.

 

●태조는 무학대사를 이 사찰에 머물게 했으며,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와 명종때 원정왕후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대규모 사찰로 확장되어 갔다. 그러나 원정왕후가 사망한 이후 불교를 못마땅하게 여긴 유학자들에 의해 스님들이 해를 당하기도 하는 등 피해를 입었으나, 이후의 임금들도 숭불 의지가 강해 유학자들과 갈등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누구도 왕을 거역할 수 없어 사찰은 유지되었으나, 왕후들이 사망한 이후 유생들에 의해 사찰은 무너져갔다. 억불정책에 의해 불교의 탄압이 시작되었으며, 결국 회암사는 알 수 없는 사유로 불 타 사라지게 된다.

 

●유생들이 불 질렀다는 설도 있고 전란에 불탔다는 설도 있으나, 억불정책으로 인해 화를 당한건 맞는 듯하다. 그동안 회암사는 잊혀졌다가 회암사지 발굴이 시작되면서 그 규모가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해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1821년 광주에 살던 유생 이응준이 지공. 나옹. 무학 대사의 부도를 모두 허무는 일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이들 스님들의 부도에 같이 있던 보물들도 도난당하기도 했다. 행위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으나, 문제는 무학대사가 조선 건국공신이었다는 점과 비문을 태조가 직접 내려짓게 했다는 점에서 이는 곧 임금의 권위에 대한 문제라는 이유로 이응준은 엄벌에 처해지고, 1828년에 이들 부도는 다시 만들어졌다.

 

●회암사지 터의 사리탑에는 회암사의 창건주 지공과 그 제자 나옹의 사리를 지공이 가져온 석가여래, 가섭불, 정광불의 진신사리와 봉안했었는데, 일제 시대에 불법으로 반출되어 1939년 미국의 보스턴미술관이 한 업자로부터 사들여 보관해 왔다.

 

●2004년에 처음 존재가 확인되고 2009년부터 반환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지지부진했는데, 2023년에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때에 김건희 여사가 다시금 회암사 사리구의 반환을 요청해서 반환 논의가 재개됐고, 최종적으로 사리 반환이 합의되었다.

 

●2024년 4월 16일에 보스턴박물관으로부터 전달받은 사리는 18일에 한국에 도착했고, 다음날인 19일 조계사의 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회암사 3여래2조사 사리 이운 고불식이라는 이름으로 고불의식을 거행했다.

 

●이후 5월 19일에 최종적으로 원래의 위치인 회암사에서 봉안대법회를 열어 사리를 봉안하게 된다. 사리는 반환되었지만 사리장엄구는 반환되지 않고 대여 형식으로 내 주기로 합의되었고, 추후 추가 협의가 더 있을 예정으로 알려졌다.

 

●한편 조계종은 돌려받은 사리를 담을 사리구를 별도로 제작했다. 3주간 회암사지박물관에서 신자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친견행사를 갖고, 회암사에 보안시설을 갖춘 후 보관하게 된다고 한다.

▲반환 사리 친견행사가 열리는 회암사지박물관 전경. 박물관 관람비는 성인기준 2천원이지만 사리만 친견한다고 말하면 무료 입장권을 준다. 매표소는 출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안내데스크 처럼 있다.

▲친견장소 입구에는 반환사리에 대한 설명과 반환과정이 안내되어 있다. 입구에는 안내인이 사리 친견 안쪽에도 안내인이 배치되어 있다.

▲친견 내부는 암막커튼 같은것으로 쳐져있으며 최대 4명이 입장가능하고 1명씩 줄을 서서 입장한다. 입구에 친견 시간과 주의 사항이 있다. 사진이나 영상 촬영은 절대 금지이니 괜히 찍다가 챙피 당하지 마시길....(내부에 안내인이 계속 지켜보고 있음)

▲사리는 사진처럼 드럼통 만한 폭의 원형에 둥글게 배치되어 있어서,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면서 볼 수 있도록 했다.(사진은 관련 기사에서 퍼옴)

▲반환사리는 부처님 3분의 진신사리와 지공선사. 나옹선사의 사리라고 한다.

▲친견에 모신 부처님과 고승에 대한 소개

▲무학대사 소개 안내문

▲지공선사 관련 안내문


▲사리환수 과정

▲태조이성계와 회암사의 스토리를 적은 안내문

▲회암사에서 발굴된 잡상들과 잡상 안내문

▲회암사에서는 중국의 청화백자 조각도 출토되기도 했다. 출토조각과 안내문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왕실 자기와 관련 안내문

▲회암사의 역사를 기록한 안내문

▲회암사의 여러가지 관련 정보를 적은 안내문

▲박물관을 나서서 왼쪽으로 보면 회암사지가 멀리보이며, 회암사지 공원을 거쳐 사찰 터 끝 사리탑까지 약 500미터 가량 된다.

▲입구에서 본 회암사지 전경이다.

▲회암사지임을 알리는 안내 간판 들

▲회암사지 안내문과 배치도

▲측면에서 바라본 회암사지( 규모가 가히 궁궐급이다)

▲회암사지터를 끝까지 오르면 사리탑과 안내문이 나온다.

▲맨 위에서 내려다 본 회암사지

▲사찰 터 입구쪽에 세워진 당간지주와 안내문

▲사찰 입구 중간즘에 세워진 괘불대와 안내문

▲당간지주 옆에 있는 연못지와 안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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