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시설/사찰

한국의 사찰 34- 봉은사

dogyein 2024. 6. 27.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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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찰34- 서울 봉은사

【개요】

●서울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봉은사는 워낙 유명한 도심사찰이며, 서울 중심가에 있어서 외국관광객들도 쉽게 찾는 사찰중 하나이다. 거의 관광코스 중 필수로 들어가있어 찾는 외국인이 평일. 주말 가릴것 없이 넘쳐난다.

●봉은사는 신라시대 지어진 사찰로 역사는 오래되었으나, 위치상 전란이 발생할 때마다 화를 입어 오래된 당우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문화유산은 오랜 것들이 남아있어 보물이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전되고 있다.

●봉은사는 신라 고승 연회국사가 794년(원성왕10년)에 견성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삼국유사기록에 연회국사는 영축산에 은거하던 고승이었다. 또다른 기록에 의하면 봉은사라는 사찰은 성전이 있던 곳이다. 성전은 왕실에서 건립하는 사찰의 조성과 운영을 위해 설치한 일종의 관부였으며, 성전이 설치될 정도의 사찰은 신라 사회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던 곳이다.

●봉은사라는 사찰이 여러곳 있으나 서울 봉은사는 문정왕후의 발원과 보우대사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고려시대를 거치며 문화유산은 거의 없으나, 은입사향로가 1344년(충혜왕 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다. 이 향로는 현재 보물 제 321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보관처는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이다.

●조선시대 접어들어 억불정책에 따라 국가 인정사찰이 크게 줄어 전국적으로 1424년 세종 6년에는 선교양종의 18개 사찰씩 36사를 승인하고, 승려도 3700여명만 인정하였으나, 이 명단에 봉은사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다 연산군때 억불정책이 느슨해 지면서, 봉은사가 전국 수사찰로 발돋움하였다.

당시 문정왕후와 보우스님의 활동에서부터이다. 도성에서 선교 양종 도회소 역할을 하던 흥천사와 흥덕사가 폐지되었으니 도성 인근에서 규모와 위상이 큰 사찰로는 봉은사가 대신 부상하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중종에 이어 명종이 즉위하고 어린 명종을 대신해서 섭정을 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정책으로 조선 불교계는 일시 부활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봉은사도 이 때 보우스님의 활동에 힘입어 수사찰의 지위를 확고히 하게 한다.

●1552년에는 승과가 실시되어 선종에서 400인의 예비합격자를 낸 끝에 최종적으로 33명의 급제자를 선발하여 도첩제가 다시 시행되었으며, 봉은사에서는 보우스님이 주도하는 선종 승과가 시행되어 봉은사 앞 들판은 승과평(僧科坪)이 되었다.

●한편 봉은사는 정릉의 지킴이 사찰로도 알려졌는데, 1562년(명종 17) 9월에 선릉의 동쪽 기슭에 있던 옛 봉은사 터에 중종의 정릉(靖陵)이 천장되었다. 중종은 처음에 왕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묻힌 희릉(禧陵)에 나란히 묻혔었다. 그런데 문정대비는 자신이 나중에 돌아가면 중종의 곁에 함께 묻히고 싶은 생각에서 중종의 능을 봉은사 터로 옮기도록 하여 정릉이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 능의 이전에따라 봉은사는 수도산의 지금의 위치에 대규모로 확장 이건 되었다. 왕릉 관련기록에서는 조정에서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당우와 요사를 창건하였기 때문에 이전보다 훨씬 웅장해져 경산제찰(京山諸刹)의 으뜸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사찰의 전모는 삼존을 봉안한 대웅보전, 관음도량의 중심인 관음전, 진여문, 식당, 12 위패를 봉안하던 어선루(御宣樓, 위패가 궁으로 옮겨간 다음에는 금속루金粟樓로 바꿔 부름), 천왕문, 해탈문, 명부전, 응향각(향로전), 나한전, 뒤에 1618년에 조성한 유초관(鍮哨罐)이 있던 심검당(승당), 운하당(선당), 강선전, 서산이 매화를 심었다는 매화당, 청심당, 수륙재 공양소인 향적전, 동별당 서행랑, 대남루, 병이 든 승려들의 입적소였던 열반당 등으로 이루어졌다.

●숭불정책을 펴던 문정왕후가 1565년 명종 20년에 승하하자 보우스님 또한 탄핵을 받아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바로 제주목사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선교 양종과 승과가 차례로 폐지되었고 보우스님과 문정황후의 노력으로 부활했던 조선 불교는 물론 봉은사도 다시 조락의 시절로 접어든 것이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등을 거치며 당우들이 사라지고, 다시 재건되는 것을 반복하면서 옛 사찰로서의 면모도 점점 없어지게 되었다. 이과정에서 활동한 이가 추사김정희다.

●북학을 마무리 지은 대학자이자 첫손꼽는 명필이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만년에 불문에 귀의하여 이곳 봉은사에서 보내면서 매일 연비를 하는 자화참회(刺火懺悔) 등을 실천 수행하였다.

●지금도 판전에 그대로 걸려 있는 현판 글씨는 추사가 돌아가기 한 달 전에 쓴 것이다. 이 ‘판전’ 글씨는 추사의 절필(絶筆)로서 대학자이자 서예가 만년의 불교적 심성이 명필의 붓 끝에서 약동하는 걸작으로서 조선 말기 불교와 유학의 원융한 만남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이후 근대에 들어서도 일제 침략과 맞서야 했다. 특히 1886년에 대형 괘불을 비롯하여 판전의 후불탱과 북극보전의 칠성탱 불사가 이루어졌고, 1892년에는 대웅전 삼불회도와 감로탱이 이루어졌으며 1895년에는 영산전의 후불탱과 신중탱, 16나한을 4폭에 나누어 그린 나한탱 등 일련의 영산전 불사가 이루어졌다.

●일제에 의해 국권을 침탈당한 이후 일제는 1911년에 사찰령을 반포하여 30 본산제에 따라 조선불교를 일제의 장악 하에 두고자 했다. 이에 따라 봉은사는 경기도 선종 대본산이 되어 서울을 비롯한 광주, 고양, 양주, 시흥, 수원, 여주, 이천, 양평, 파주 등 8군 78개 말사를 관할하게 되었다.

● 1912년에 첫 주지로 취임한 나청호학밀(羅晴湖學密, 1875-1934) 강백은 일제 불교의 침투에 대응하여 전통 불교를 수호하려는 원종 종무원에 감사부장으로 참여하며 각황사에서 포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1912년에 봉은사 주지로 초빙된 청호화상은 세간에 나서는 실천행을 제창하여 절 부근의 황무지를 개간, 20만평에 이르는 막대한 토지를 확보하고 사원을 중창하여 30 본산 갑찰의 형세를 가꾸었다.

※청호화상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홍수로 한강이 넘쳐 집과 논밭이 떠내려가고 셀 수 없는 사람들이 강물에 떠내려갔다. 청호화상은 사중을 불러 모아 배를 띄우고 물에 뛰어들어 사람을 하나씩 건져냈다. 이렇게 구한 인명이 무려 708인이었다. 이를 기리는 비가 세워져있다.

●이후 1939년에 봉은사에서 다시 대형화재가 발생해 판전만 제외하고 모두 전소되었다. 다시말해 현재 가장 오래된 당우는 판전이다. 그러나 또다시 1950년의 전란으로 당우 대부분이 소실되고 말았다. 그래서 전란이 끝나고 부분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지속적인 발전을 보였다. 그리고 1960년대 정화를 겪으면서 통합종단 조계종이 출범하고 봉은사도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친 봉은사는 현재 대웅전을 비롯하여 선불당, 명부전, 영산전, 북극보전, 판전, 충령각, 운하당, 선원, 심검당, 법왕루, 보우당, 진여문 등의 당우가 미륵대불과 함께 경역을 이루며 대중적 포교활동과 사회복지를 실현하는 도심 대찰의 위상을 이어가고 있다.

【역대 주지】

●연회국사(신라고승. 창건주. 8~9세기), 허응당 보우대사(1509~1565), 서산 휴정대사(1520~1604), 사명 유정대사(1544~1610),벽암 각성선사(1575~1660),남호 영기율사(1820~1872),청호 화상(1875~1934), 한암 중원대종사(1876~1951),운허 용하대종사(1892~1980), 금오 태전대종사(1896~1968),청담당 순호대종사(1902~1971),이목당 서운대종사(1903~1995),영암당 임성대종사(1907~1987), 석주당 정일대종사(1909~2004),금하광덕 큰스님(1927~1999)등이 있다.

【국가지정문화유산】

●현재 봉은사에는 봉은사 청동 은입사 향완 보물 제321호, 봉은사 청동 은입사 향완 보물 제321호가 보물로 남아있다. 1344년때 만들어진 것으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 봉은사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보물 제1819호, 봉은사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보물 제1819호(시대 1651년)도 있으며 대웅전에 보관되어 있다.

●이밖에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판전 전각 425호등 수십여개가 지정되어 있다.

【특징】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도심 사찰의 특징을 잘살려 외국인에게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찰로서의 의미보다는 한국의 전통건축물로서 아름다움을 보러 오는 외국인이 많다. 물론 같은 불교문화권인 국가 사람에게는 불교 사찰로서의 의미도 클 것이다.

●그런 연유인지 경내에서는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있다. 관련 용품이나 음료, 공양음식들도 상대적으로 다른 산속 사찰에 비해서도 저렴한 편이다. 가령 웬만하 음료들이 한잔에 3-4천원 수준이다.

●지하철로도 쉽게 접근 가능하며 예전에는 삼성역을 이용해, 코엑스를 가로질러 봉은사에 갈 수 있었으나, 현재는 봉은사역(지하철 9호선)이 신설되어 역에서 내리면 바로다. 특히 길하나 사이에 코엑스가 있어 외국이 관광객이 많이 찾는 쇼핑및 숙박시설들이 많아 이 메리트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요즘 사찰이 대부분 그렇지만, 템플스테이를 비롯해 빈 공간에 새로운 건물들을 계속 지어서, 전통사찰이 지닌 고전적인 멋이 점점 줄어든다. 이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사찰, 대형사찰일수록 더 그렇다. 봉은사도 비슷하다.

●봉은사에는 현재 많은 공사가 진행 중 이어서 경내가 다소 복잡하고 어수선한 모습이다. 빨리 공사를 마치고, 국내외 참배객이나 방문객들에게 정갈하고 고풍스런 한국의 대표사찰의 모습이 보여질 수 있기를 바란다.

●도심사찰 특성상 무료로 할 수 없어 부득이 주차료를 받는다. 다만 사찰 방문 목적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경내 상업시설을 일정 금액이상 이용하면 무료할인권을 준다.

봉은사 주차비는 기본요금이 1시간 3,000원이며, 이후 10분당500원이 부가된다. 일 최대 2만원이다.

▲봉은사 안내도

▲봉은사 입구 코끼리상

▲봉은사 입구. 일주문이 아니라서 대문 역할을 하는 듯 하다. 도심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 있는 사찰이라 주말. 평일 가릴것 없이 내외국인이 언제나 가득하다,

▲서래원 (공양간)과 불교용품을 파는 공간이며, 사찰 일주문 지나자마자 있다. 카페. 베이커리. 잔치국수등의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진여문. 사실상 일주문이며, 내부에 ▼(아래순서대로)증장천왕. 지국천왕. 다문천왕.광목천왕 등 사천대왕이 있다. 1939년 소실후 새로지었다고한다.

▲대문에도 사천대왕이 그려져 있다.

▲경내에서 바라다본 진여문


▲각종 공덕비등 비석들을 한 곳에 모아놨다.

▲입구쪽 연못에 있는 연지관세음보살상

▲법왕루 정

▲▼법왕루 측면

▲법왕루 현액

▲비구성인대화상 부도

▲영암당 인성대종사부도비

▲주인을 알수 없는 부

▲남호대율사비

▲주지나청호대선사 수해구제공덕비: 1925년 대홍수때 사람을 많이 구했다고 한다.

▲글자가 흐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나청호대선사의 부도인듯 하다.

▲조선선종갑찰비

▲허응당보우대사봉은탑

▲누구의 부도인지? 비가 있는 스님의 부도일텐데...

▲백곡처능능대선사비명

▲누구의 부도인지? 비가 있는 스님들의 부도일텐데...

▲매화당: 전통문화체험장소. 사명대사가 임진왜란때 끌려간 포로를 구축하며 같이 가져온 매화를 심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선불당: 대중들이 참선하는방이다. 1941년 중건. 서울시유형문화재 64호

▲선불당 불상과 불화

▲선불당 측면▼선불당 현액. 파란색이다.

▲선불당 안내판

▲▼템플스테이체험관(수월관)

▲지장전과 ▼지장전 현액: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당

▲지장전 시왕

▲지장전 소고

▲지장전 탱화

▲지장전 시왕

▲지장전시왕

▲지장전 시왕

▲지장전 지장보살과 좌우로 무독귀왕. 도명존자

▲지장전 탱화

▲▲지장전 단청▲지장전 측면벽화

▲지장전 좌측 지붕

▲전통문화체험관/ 아래층엔 전통음악체험실이 있다.

▲시왕전 건립불사와 관련한 안내문

▲대웅전 목조 석가여래삼불좌상 안내판

▲대웅전 홍무25년 장흥사명 동종 안내판

▲대웅전 불도 안내판

▲대웅전 목 사천왕상 안내


▲영산전 현액

▲영산전 불상

▲▲▲영산전 16마라한. 존자들

▲영산전(단청): 연등으로 당우를 찍기 어렵다. 영산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보처인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의 양 옆으로 16아라한이 옹위하고 있으며 후불탱화와 16나한도, 신중탱화 등의 불화가 있다. 영산전은 나한님을 모셨기 때문에 나한님의 영험을 입고자 하는 불자들의 기도 발원이 간절한 곳이다.

▲영산전 불도 안내판

▲영산전 목 삼도불상 안내판

▲영산전 목 16나한상 안내판

▲북극보전 현액

▲북극보전(삼신각)의 칠성탱화

▲북극보전 산신. 독성도

▲▲영각 현액 ▲영각: 역대 조사스님 8분 진영이 모셔진 곳

▲영각의 다른 이름 충령각

▲영각 불상: 지장삼존불과 무독귀왕. 도명존자

▲좌) 연회국사 진영 . 우)나청호대선사 진영

▲영암당 임성대종사 진영

▲남호당 영기대율사 진영

▲백곡당처능대선사 진영

▲사명당 유정대선사 진영

◆청허당 휴정대선사 진영

▲허응당 보우대사 진영

▲미륵대불: 1만명 시주 10년간 건립. .

▲언덕서 내려다 본 봉은사

▲미륵대불 사천대왕 부조

▲미륵대불 석등

         

▲23개의 보살입상 배치

▲벽면에 3,999개의 미륵원불 봉안

▲미륵대불 입구 지키고 있는 사자모양 석물

▲판전: 봉은사에서 가장 오랜 당우다. 1855년 영기스님과 추사 김정희가 판각 화엄경소초 81권을 보관하기위해 지은 곳. 현재 13종 3,503점의 경판 봉안. 비로자나부처님 주불

▲판전 현액: 추사 김정희의 유작이다.

▲판전 앞의 석등

▲판전 관련 안내판

▲판전은 사진 촬영이 금지된 당우여서 주불상은 촬영 못했다.

▲판전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안내판

 

▲판전 신중도및 비로자나불도 안내판

▲흥선대원군 비각

▲흥선대원군영세불망비

▲'조선불교조계종대본산봉은사주지대비'라고 적혀있다. 많이 깎여서 잘 보이지 않는다.

▲추사 김정희 선생 기적비

▲요사채 ▼요사채 측면

▲죽림정사: 국내·외 주요인사 초청 차담 및 사찰음식 체험 등 공익 템플스테이를 위한 공간이다.

▲다래헌: 스님들의 수행처.▼다래헌 현액

▲범종각

▲범종각 현액

▲범종각의 범종

▲미륵반가사유상

▲날물곳: 약수터인데 식수 금지다

▲종루

▲종루의 법고


▲종루 범종

▲종루의 목어

▲미륵전. 이곳이 원래 법왕루 였으나, 법왕루 신축이후 미륵전으로바뀌었다. 계단을 다 오르면 미륵대불이 나온다.

▲미륵전 기둥( 단차를 이용해 지었다).

▲운하당: 요사채로 쓰이는 곳이다

▲운하당 현액

▲운하당 앞의 작은 다육식물

▲운하당 바로 아래의 요사채

▲운하당 바로옆에 비석이 하나 서있다. 수도산 봉은사라고 적혀있고 사람이름이 있는 걸로 봐선 시주 공덕비인듯 하다.

▲소각장: 영가의 물품을 태우는 곳

▲대웅전 측면

▲대웅전 현액

▲대웅전 단청 용모양

▲대웅전 삼존불 옆의 사천대왕상

▲대웅전 삼존불상과 탱화

▲대웅전에서 마침 제사중이어서 불화를 제대로 찍지 못했다.

▲대웅전 앞 마당의 석등

▲대웅전 앞 3층 석탑

▲대웅전 마당에 연등이 걸려있어서 현액이 안보인다.ㅠ

▲대웅전 목판 그림

▲사찰음식문화연구소(심검당): 선방이다. 창건당시부터 있던 건물이나 1939년 소실후 1941년 새로지었다.

▲연희다원(연루): 차를 파는 곳이다.

▲주차요금 정산기: 사찰내 판매시설서 물품 구입시 1만원이상 2시간 무료다.

▲사찰입구 향적원쪽에 작은 연못에 서있는 입불상

▲보우당 입구쪽 우측에 있다. 2000년 아셈회의때 정부지원으로 지어진 건물이며, 보우대사의 불교증흥의 뜻을 기리기위해 지었다. 교육과 신행활동, 어린이법회등이 진행된다. 단차를 이용해 지은 건물로 지하층에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무료진료소도 있다.

▲향적원: 공양간이다 ▼11시30분-12시30분까지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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