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시설/사찰
조선 세조의 부부 묘역 남양주 광릉
dogyein
2024. 7. 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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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조의 부부 묘역 남양주 광릉
【개요】
●광릉은 사적 197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임금 1468년 9월(11월 국장) 서거한 세조와 1483년 3월(6월 국장) 별세한 그의 아내 정희왕후 부부가 안장된 왕릉이다. 전체 능이 좌우로 있는데 좌측이 세조의 능이고, 우측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광릉은 주차장-매표소-광릉역사문화관-세계문화유산표적-재실- 능-정자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좌측으로는 광릉숲이 있고 광릉내부에서 좌측으로 얕은 산을 한바퀴도는 산책길이 있다.
●광릉은 조성한 지 3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봉분이 무너졌다. 원인은 사대석을 사용하지 않은 것과 능 안쪽에 삼물회를 과다히 높이 쌓아서 잔디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해결책으로 능을 넓히고 흙을 두텁게 덮어서 사초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고, 지형의 경사를 높여서 물이 잘 흐르도록 다시 조성했다.
●1754년에 표석을 세우고 비각을 갖추었다. 1962년에 광릉 주변 산림이 크낙새서식지로 지정되었으며, 1999년 인근에 국립수목원을 건립하였다.
●세조는 생전에 자신의 왕릉을 조성할 때 죽을 때 빨리 썩어야 하니 석곽과 묘실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자신에게 큰 돈을 쓰지 말고 간소하게 능을 조성하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세조는 회곽묘 형태로 관이 들어갈 구덩이만 석회로 다진 회곽에 안장했는데 역설적으로 석회가 주성분인 삼물이 돌처럼 굳어 방수 기능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회곽에 안치된 시신은 석곽에서보다 천천히 썩으며 그걸 넘어서 사실상 안 썩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무덤에서 미라가 대거 발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존에는 왕릉 건축과 조성 과정에서 엄청난 돈과 백성들의 인력이 동원되어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렸는데, 세조가 부역 인원과 조성 비용을 절반 이상 감축하게 한 것이며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시신이 빨리 흙이 되어야 좋다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광릉은 절반의 비용을 들였으며, 조선 왕조는 물론 조선 장례 문화 변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이후의 왕릉 조성에도 큰 모범이 되었다. 조선의 관혼상제 예법을 적시한 주자가례에도 장례 방식이 회곽묘로 되어있으나, 정작 회곽 묘의 원산인 중국에선 회곽묘가 흔하지 않다.
●1483년 그의 정실 정희왕후 윤씨도 세상을 떠난 후 이곳에 묻혔다. 원래는 정창손의 조부인 정흠지의 묘가 있었으나 이장시켰다.
●원래 정해진 능호(陵號)는 지금의 이름인 광릉이 아닌, 태릉이었다. 그러다 예종이 태릉을 제시했는데 신숙주가 재논의 과정에서 태릉은 암군이자 후대의 평가가 좋지 않은 당 현종의 능호와 똑같다는 이유로 반대해서, 결국 광릉(光陵)으로 정해진다. 이 태릉(泰陵)이란 능호는 나중에 문정왕후의 능호가 된다.
●광릉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효시이다. 동원이강릉이란 하나의 정자각을 가운데에 두고, 정자각 뒤편의 2개의 언덕에 각각 능을 구성하는 형식으로서 보통 정자각에서 바라보기에 좌측이 왕의 능이고, 오른쪽이 왕비의 무덤이다. 이 법도를 벗어난 무덤으로는 조선 왕조의 추존 왕인 덕종과 소혜왕후가 묻혀 있는 경릉(敬陵)이 있다.
【특징】
●광릉은 봉선사 바로 옆에 붙어있다. 봉선사에서 광릉수목원 입구 방향으로 1키로미터 더 숲으로 들어가면 된다.
●광릉은 주차장에 다다르면, 정면으로 매표소가 있고 좌측으로 출입구가 있다. 출입구를 통과하면, 바로 광릉역사문화관이 보이고, 좌측으로 능으로 가는 입구가 나온다.재실을 끼고 좌측으로 계속 가도 되고, 중간에 빠지는 길로 가도 된다. 중간에 빠지는 길로 오르다 보면 홍살문이 보이고 홍살문을 지나면, 정자각과 수라간. 수복방. 비각이 보인다.
●정자각 뒤편으로 좌우로 언덕 위에 능이 있는데 좌측이 세조의 묘이고, 우측이 정희왕후의 묘이다. 전방 200-300미터부터 펜스를 쳐놔서 아예 접근금지라서 능을 자세히 볼 수 없다.(묘지기가 의자에 앉아 지켜보고 있다ㅎ) 콘서트에 갔는데 얼굴도 잘 안보이는 맨 뒷자리에 앉아보는 느낌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접근 할 수 있도록 했으면 싶다.
●왕과 왕후의 현궁은 회격으로 만들었으며, 봉릉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을 둘렀다. 왕후의 난간석에 동자주에는 십이지상이 세겨져 있어 특징적이다. 병풍석의 면석에 십이지신을 조각하여 방향을 상징한 것을 병풍석을 생략하면서 난간석 동자주에 표현한 것이다.
●홍살문을 지나면 나오는 정자각은 본래 8칸에 팔작지붕으로 건립되었으나, 현재는 정전 3칸, 배위청 2칸으로 총 5칸 규모이다. 정자각 뒤쪽으로 28보 위치에 망료위가 있으며, 서북쪽으로 27보 위치에 비각을 갖추어 표석이 서 있다. 정자각의 남쪽으로 270보 자리에 홍살문이 있다.
●좌측으로는 얕은 산을 따라 숲길이 개방되어 있는데 개방시기가 있으니 그때 갈 수 있다. 한 20-30분정도 걸린다고 하니 시간이 되면 한바퀴 돌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

▲관람 관련 제반 사항 안내판

▲주차장 꽤 넓은 편이다.

▲주차장 매표소 입구에 있는 남양주 관광안내판

▲남양주 광릉 안내도

▲세계문화유산표적있는 방향

▲광릉안내 이정표

▲재실 전경

▲재실 안내문
▲재실

▲재실별채

▲광릉숲길 개방 안내도

▲광릉 숲길
광릉가는숲길

▲입구에서 400여미터 오르면 홍살문이 나오고 뒤로 정자각이 보인다.

▲홍살문까지 길은 아름드리 나무 숲이어서 한여름에도 덥지 않게 갈 수 있다.

▲▼정자각 좌우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정자각 뒤 좌우의 언덕을 오르면 능이 나온다.



▲정자각에서 지내는 기신제 안내문

▲광릉 안내문

▲광릉 상설안내도

▲정자각 좌측에 있는 수라간

▲정자각 우측에 있는 수복방.

▲수복방 좌측으로 비각이 있다.▼비각의 비문 안내판


▲좌측의 세조 능

▲정희왕후의 능



▲정자각 지붕위의 잡상 석물들

▲광릉 역사문화관

▲광릉 안내

▲광릉 공간구성

▲세조와 정희왕후의 생애및 가족도

▲광릉조성경위

▲조선 왕릉 공간 구성도

▲전국 조선시대 왕릉 분포도.

▲세계문화유산 지정 안내문

▲사적지정안내비와 하마비: 하마비는 신성한 곳이니 모두 말에서 내려걸어가라는 뜻

▲하마비 쪽으로 나있는 숲길

▲사적비

▲사적비 맞은편에 정2품송 후계목이 자라고 있다.▼관련 안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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