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

적상산 사고지(조선시대 실록 보관소)

dogyein 2024. 7. 24.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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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산 사고지(조선시대 실록 보관소)

●적상산 사고 유구지는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로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적상면에 있는 조선후기 실록 등 각종 사서를 보관하던 사고터(史庫址)이다..

●정식명칭은 적상산사고지유구(赤裳山史庫址遺構)로, 조선시대 왕실의 족보와 각 임금의 실록을 기록한 것을 보관하는 곳이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기록물전시관즈음 될 듯 싶다.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117-5번지에 위치해있으며, 1995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적상산에 사고가 설치된 것은 1614년(광해군 6)이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에 보관 중이던 실록을 제외하고 나머지가 전소되자, 선조가 태조대부터 명종대까지의 실록 3부를 더 인쇄해 전주본 원본과 교정 인쇄본을 합쳐 실록 5부를 만들어 춘추관 · 마니산 · 태백산 · 묘향산 · 오대산에 각각 1부씩 분치(分置)하였다.

●그 뒤 1614년 적상산에 '실록각'을 건립하고 1618년에 묘향산사고의 실록 일부를 옮겨 보관했으며, 1633년(인조 11) 나머지 실록을 모두 적상산사고로 옮겼다. 1641년(인조 19) 이곳에 '선원각'을 건립하고 《선원록 璿源錄》을 봉안함으로써 적상산사고는 완전한 사고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 북방에 위치한 묘향산사고(妙香山史庫)가 후금의 위협뿐만 아니라 사고 관리의 소홀로 소장 도서가 망실(亡失)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다른 적당한 장소에 실록을 이치(移置)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1610년(광해군 2) 순안어사 최현과 무주현감 이유경의 요청에 따라 사관을 적상산에 보내 땅 모양을 살피게 하고 산성을 수리하게 하였다. 1614년 적상산성 안에 '실록전'을 건립했으며, 4년 뒤인 1618년 9월부터 실록이 봉안되기 시작, 1633년(인조 11)까지 묘향산사고의 실록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서 보관하였다.

●이곳에는 실록 824책, 선원록 1,446책, 의궤260책, 잡서 2,984책으로 총 5,515책이 보관되었다 한다. 이 서책들은 1910년 이후 일제에 의해 장서각으로 옮겨졌다가 6·25당시 부산 동래로 대피시켰는데, 그 뒤 실록의 행방은 알 수 없다.

●적상산사고의 건물은 사고 12칸, 선원각 6칸, 수사당 6칸, 승장청(僧將廳) 6칸, 군기고(軍器庫) 7칸, 화약고 1칸으로 이루어졌다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건물들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 단지 선원각만 현재 안국사의 천불전으로 개수되어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사고지 유구는 1992년 무주 양수발전소 상부댐 건설로 수몰되어 그 위 기슭으로 이전 복원되었으며, 1995년 6월 20일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병자호란 때 5사고 중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의 실록이 산실되어 이를 다시 보완하는 작업이 1666년(현종 7)에 시작되었다. 이 때 적상산사고본을 근거로 등사 · 교정 작업을 했는데 3도 유생(三道儒生)이 300명이나 동원되었다. 이 사고의 설치를 계기로 사고의 수호와 산성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승병을 모집하고 '수호 사찰'을 건립하는 등 여러 방안이 강구되었다.

●사고 설치 직후에는 승려 덕웅이 승병 92명을 모집해 산성을 수축하는 한편, 분번(分番)으로 사각(史閣)을 수호하였다. 특히 정묘호란 때에는 사고를 지킬 사람이 없어 승려 상훈(尙訓)이 사고의 서책을 성밖의 석굴로 옮겨 보관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 사고에 다시 봉안하였다. 사고의 수호가 이와 같이 어려워지자 1643년 산성 안에 호국사를 창건해 수호 사찰로 하였다.

●조선 말기에 사고가 퇴락해 1872년(고종 9)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했으며, 1902년에는 대대적인 개수 공사를 하였다. 1910년 조선의 주권을 강탈한 일제는 실록을 구황실문고(舊皇室文庫)로 편입해 장서각에 보관시켰다.

●그러나 산질(散秩)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뒤 6 · 25전쟁 중에 분실되어버렸다. 실록전과 선원각의 건물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선원각은 부근 안국사 경내로 옮겨져 천불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무주 적상산 안국사를 오르다보면 우측 산쪽으로 사고지유구로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물론 그 아래에도 계단을 만들고 안내판을 붙여놨지만 출입금지로 사슬을 쳐놨다.

▲ 적상산 안국사 방면으로 오르다 보면, 적상호 둘레에 이런 표지석이 하나 서있다.안국사가 적상호 안에 있다 수몰되면서 이전하였는데, 사고지도 마찬가지 인듯하다. 이와관련한 비가 있지만 글자가 손상되어 읽기 힘들다.

▲적상산 사고 안내판

▲선원각: 선원각은 조선시대 궁궐의 족보를 기록한 사료를 보관한다.

▲선원각 내부를 안내하는 판이다.

▲이 지역이 포함된 무주도호부 관련 안내 글

▲사고가 속해있는 무주부의 지도

▲사고 안내문이다. 모든 전시물은 내부에 있다.

▲사고 주변의 모형도이다.

▲적상산 사고 관련 연보이다. 안타깝게 한국전쟁때 많이 북한으로 반출되어, 현재 실록 원본은 많이 없다.

▲조선 후기 5대 사고 안내다. 오대산. 태백산.마니산. 묘향산. 서울춘추관 이렇게 5곳이었으나, 마니산 사고를 강화도 정적산으로, 묘향산 사고를 무주 적상산으로 이전했다.

▲조선왕실족보 전시물

▲선원계보기략 안내판

▲조선시대 사고 변천사


▲실록강 내부 안내판

▲조선왕조실록 안내판

▲조선왕조실록 편찬도

▲조선왕조실록 편찬 안내

▲묘향산에서 적상산으로 사고를 이전할때 행렬을 만든 모형물

▲조선왕조실록 봉안도

▲조선왕조실록 봉안 안내

▲사관및 사초 안내문

▲조선왕조 실록 전시. 전란으로 북에 넘어간 원본이 많으며 현재 전시된 것중 원본은 일부에 불과하다. 상당수는 북의 김일성종합대학 같은데 있다고 한다.

▲고종, 순종의 실록

▲고종과 순종의 실록은 일제가 편찬한 것이어서, 학계의 외면을 받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 제외된다고 한다.

▲실록포쇄도

▲실록포쇄 관련 설명

▲사고수호도

▲사고 수호란? 조선시대에는 사고를 지키기위해 절을 짓거나 기존 사찰에게 명령을 내려 사고를 수호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 임무를 맡은 사찰 주지는 참봉이라는 직책을 받았다.

▲실록보관함.

▲실록보관함 안내

▲사각 현액

▲사찰 입구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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