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시설/사찰

한국의사찰57- 강화 정수사

dogyein 2024. 8. 26. 07:47
반응형

한국의 사찰 57- 강화 정수사


●정수사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회정대사가 639년에 창건한 사찰이며 조계사의 말사이다. 창건설화가 있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설화이다. 강화도의 사찰들은 대부분 삼국이나 고려시대의 사찰이라고 하지만, 기록이 없다는 점이 아쉽다.

●창건 설화에 의하면 회정대사는 마니산의 참성단을 참배한 뒤 그 동쪽의 지형을 보고 불제자가 가히 삼매정수 할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고 절을 창건하였다한다. 그 뒤 1426년(세종 8) 함허화상이 중창하였으며, 중창한 뒤 함허는 법당 서쪽에서 맑은 물을 발견하고 절 이름을 정수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1848년(헌종 14) 비구니 법진과 만흥이 법당을 증수하였고, 1878년(고종 15) 비구니 계흔이 그의 제자 성수 등과 불상을 개금한 뒤 칠성 · 독성 · 산신탱화 등을 봉안하였다. 1883년 비구니 근훈이 중수하였고, 1888년 정일이 연오의 시주를 얻어 관음상 1위와 후불탱화를 조성하였다.

 

●1903년 정일이 산령각을 중건하였고, 1905년 법당을 중수하였으며, 1916년 불상을 개금하고 각단의 탱화를 봉안하였다. 1937년 주지 김선영이 대웅전을 당국의 보호건물로 편입시켰다.

 

●당시 이 절의 당우로는 대웅전 · 산령각 · 대방 · 노전 · 요사채 등이 있었으나, 현존 당우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과 산신각 ·오백나한전. 요사채. 공양간. 종무소 만이 있다. 현존하는 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불을 비롯한 불상 4위와 1851년에 조성한 현왕탱을 비롯한 탱화 7점, 법화경과 은중경, 함허대사부도 1기, 중종 1구 등이 있다.

 

●정수사는 함허대사와 불가분의 관계인 듯 하여, 그에 대해 알아보자.

함허스님은 고려말인 1376년(우왕 2)에 충청도 중원에서 태어났으며, 속명은 ‘수이(守伊)’이고 호는 ‘무준(無準)’이었다. 출가후 법명을 기화, 호를 득통이라 하였으며, 그가 주석 했던 자모산에서는 당호를 함허당이라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주역>에 침잠하는 등 전통적 유학수업을 충실히 하였으나 함께 수학하던 성균관의 벗이 죽는 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과 육신의 허망함을 깨닫고, 21세에 관악산 의상암으로 출가하였다.

 

이듬해에 회암사로 가서 왕사였던 무학대사를 친경하여 법요를 듣고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용맹정진으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 그는 여러 지역에 주석하며 중생교화를 위해 금강경을 강의하기도 하고 사찰을 중수하는 등 수행과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힘쓰며 조사의 가풍을 널리 떨쳤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로는 <금강경오가해설의>2권, <현정론>1권, 그리고 <함허득통화상어록> 1권이 있다.

<현정론>은 유학자의 그릇된 배불론에 대해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한 호불론서이며, <유석질의론> 또한 배불에 대한 반론서로서 일종의 불교개론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금강경오가해설의〉에서는 그의 치밀하고 깊은 선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밖에 불가(佛家)에서 반드시 읽히는 <원각경>·<법화경>· <선종영가집> 등의 대승경전에 주석을 덧붙이기도 했다. 스님은 선과 교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쇠락한 불교계의 중흥을 위해 헌신한 분이었다.

 

함허당 기화스님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억불정책의 풍조 속에서 정법을 수호하고 오해와 무지를 없애기 위해 크게 노력한 분이다.

그의 부도가 이 곳 정수사에 있는가 하면 이 절 앞의 계곡은 그의 당호를 빌려 함허동천 계곡이라 불리고 있으니 정수사에는 함허스님의 얼이 곳곳에 스며있다고 하겠다.

 

함허스님이 출세했던 시대는 고려왕조와 조선왕조가 교체되는 격동기였으며, 사상적으로도 국가의 지도이념이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게 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함허스님은 감정적, 대립적인 차원에서 해결이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교교단 존립의 정당성을 합리적인 차원에서 천명함으로써 유학자의 그릇된 불교비판에 세찬 죽비를 가하였다.

 

한편, 함허스님이 원나라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강도지에 보이는 내용인데, '고려말 원나라 승려이자 한림학사였던 함허 득통이 이곳에 와서 도를 닦았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그의 부인이 바다를 건너 이곳에 찾아와 함께 돌아갈 것을 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득통이 그 청에 응하지 않자 부인이 바다에 빠져 죽어 돌로 변했는데 지금 절 앞 극포 가운데의 세칭 각씨암이 그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설화일 뿐이며, 함허대사는

여러 책에 행장이 전해오고 있을 뿐 아니라 저술도 많이 남아있는 등, 중국 원나라의 승려는 물론 아니라는게 정설이다.

스님은 1431년(세종 13) 겨울 노구를 이끌고 봉암사에 들어가 쇠락한 절을 수리하고 선풍을 진작시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년 후 4월 어느 봄날 허허롭게 고요함에 들었다.

다비후 사리를 모아 그가 오랫동안 주석 했던 이 정수사를 포함하여 인봉사 · 현등사 · 봉암사 등 네 곳에 부도를 세워 그 덕화를 가리도록 하였다.

 

●정수사에는 사찰의 규모에 비해 문화유산이 많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을(161호) 비롯해, 아미타후불탱 · 지장탱화 · 칠성탱화 · 현왕탱화 · 신중탱화 및 삼성각의 목각산신탱 독성탱화 · 칠성탱화 · 용왕탱화 등 중 상당수가 지방문화유산 등으로 등재되어 있다.

 

●대웅보전은 1423년 세종 5년에 준공 건물로 대웅전으로는 특이하게 툇마루가 있다. 대웅전 중앙의 문살로 인해 보물로 지정되었다.

 

●오백나한전의 지장보살상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아미타 후불 탱화와 대웅전의 지장탱화, 칠성탱화 등이 모두 1878년 그려진 작품이다. 또 현왕탱화는 1851년 작품이며, 신중탱화는 1910년대 이후로 추정된다.

 

●사찰 오른쪽 뒤편에 있는 함허대사 승탑은 강화군 향토유적19호로 지정되어 있다. 1426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징】

●정수사는 강화도의 전통사찰 4곳을 둘러보는 일정 중 하나로 방문했다. 백련사. 청련사에 이어 세 번째로 방문했다. 그런데 주차장에 도착하니 경내 공사 중 이어서, 백팔계단을 통해서만 경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앞 서 오르는 방문객이 휴대폰으로 뭔가를 계속 찍길래 뭘 찍나 싶었다.

 

●다 오른 뒤 사찰 맨 뒤에 있는 부도부터 방문하려고 공양간 쪽으로 발길을 옮기니, 거사 한 분이 줄을 쳐놓은 곳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한다. 의아해서 물으니, 지금 희귀종인 상사화가 올라오고 있는 중이어서, 다 필 때까지는 출입금지라고 한다. 그제서야 108계단 양 옆으로 상사화가 꽃을 하나둘 피우고 있고, 사진 컨테스트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쨌든 공양간을 뒤로하고, 산 위로 계단을 따라 100미터 가량 오르니 함허대사 부도가 노송 아래 자리 잡고 있다. 부도를 빙 둘러 한 바퀴 돌고 안내판을 읽어보고, 사찰로 내려왔다. 사찰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느낌이 중형 사찰 정도로 느껴졌다.

 

●유난히 이 사찰에서는 평안함이 느껴져, 사찰을 다 돌아본 뒤에서 한 시간이나 더 머물렀다. 오가는 방문객들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대중 불교를 제대로 펼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평일임에도 꾸준히 찾는 사람이 있었고, 공사 중 이었지만 어수선한 느낌도 그리 들지 않았다.

●곳곳에 붙여진 프래카드를 보니 바로 엊그제 8월 10일 함허동천 작은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8월에 상사화 사진컨테스트도 진행한다. 이런 것이 모두 대중에게 다가가는 불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부분들이 찾는 이를 편안하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충북 진천의 어떤 사찰에 가면 감시카메라로 요사채서 보고 있다가, 법당 내부 사진을 찍으니, 사찰이 떠나가라 큰 목소리로 야단을 쳐서, 정나미가 뚝 떨어진 적도 있다. 순간 사찰 뿐 아니라 종교로서의 불교에 대한 인식도 크게 나빠졌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찰은 방문객의 행동이 큰 해가 안되면 개의치 않지만, 사찰을 답사형태나 마음의 휴식. 관광등으로 찾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소수의 사찰에서 보여주는 불교인의 모습이, 불교에 대한 이미지를 크게 악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희극인에게 법명을 부여하여, 소위 MZ세대라 불리는 젊은 층을 끌어들이기 위한 불교계의 노력을 생각하면, 불교인들이 좀 더 대중에게 다가가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할 듯 하다.

●끝으로 정수사는 드라마 '나의아저씨' 촬영 장소로도 널리 알려지고 있다. 사찰 내 대웅보전 툇마루부터 여러곳에서 촬영이 진행된 듯하다. 대웅전 마루와 정수카페에 작게 드라마 사진이 있다.


 

▲주차장 입구에 정수사 안내석

▲정수사의 당우 안내도이다.

▲정수사 입구에 있는 대법당 안내판.

▲주차장 좌측으로 나있는 계단. 이리로 가면 종무소쪽이 나온다.

▲주차장서 경내로 연결되는 108계단. 좌우 양측으로 상사화 군락지가 있는데, 현재는 출입금지다.

▲108 계단을 오르다보면 정수사를 받치고 있는 석축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계단을 다 오르면 이정표가 붙어있다.

▲경내에 올라서면 함허대사 느티나무라는 큰나무가 있다. 큰나무 안내판이다.

▲우측으로 가면 공양간을 지나 함허대사승탑 이정표가 보인다. 목재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약 100미터 가량 올라가야 한다.

 

▲함허대사 승탑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이 지그재그로 계속 이어진다.

▲승탑으로 오르는 중간에 거대한 바위가 있다. 언핏보면 새의머리 같기도하고 물고기 같기도 하다. 틈새로 식물이 자라고 있다.

▲함허대사 부도. 부도의 역사에 비해 그렇게 고풍스럽지는 않아 보인다.

▲함허대사 부도 안내판

▲승탑가는 길 옆에서 본 석축

▲군락지에 들어가지 못해 멀리서나마 피어있는 노란 상산화를 찍어봤다.

▲부도 가는 길 입구에서 공양간을 찍어봤다. 1층은 공양간인데 2층은 요사채 인가?

▲경내에서 공양간으로 연결되는 돌계단

▲승탑가는 길로 연결되는 쪽대문

▲부도 초입에서 좌측으로 빠지면 석가탑이 하나 세워져있다.

▲석가탑은 대웅보전 옆으로도 연결되어 있다.

▲대웅모전 옆에는 야외 기도처와 소각장이 있다.

▲대웅보전 뒤편으로는 거대한 바위가 병풍처럼 보호하고 있다.

▲대웅보전 측면이다. 앞에 툇마루를 덧대서, 맞배지붕 앞뒤가 비율이 다르다. 거의 정사각형 모양이다.

▲대웅보전 안의 탱화


▲대웅보전에서 제사 중이어서 전면을 찍어봤다. 연등때문에 전체적인 모양을 찍지 못했다.

▲대웅보전의 현액이다. 대웅보전은 국가유산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보전 보물지정 기념비

▲대웅모전 내 주불상이다.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측부터 지장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관음보살이다.

▲대웅전 화엄성중 탱화..화엄성중은 성스러운 호법신의 무리를 뜻한다. 일반적으로는 현재는 대부분 신중탱화라고 한다. 사실상 같은 말이다.

 

▲대웅보전 내부의 동종

▲대웅보전의 문살문양. 대웅보전이 보물이 된 이유도 이 문살 문양때문이다.

▲삼성각 계단 옆으로는 정수터와 야외 기도처가 있다. 기도처앞에 불상이 하나 모셔져 있다.

▲기도처 옆으로는 마니산 정수에 대한 안내문이 있다. 유리문으로 닫혀져 있으나, 안을 보니 식수로는 부적합한 듯하다.

▲마니산 정수(석간수)에 대한 안내판이다. 정수는 보통 기도때 떠다 놓는 깨끗한 물을 말한다. 석간수는 돌(바위) 사이에서 나오는 물이라는 의미다.

▲대웅보전 좌측으로는 삼성각을 오르는 계단이 있다.

▲삼성각 용왕도

▲삼성각 독성도

▲삼성각 산신도

▲삼성각 칠성도

▲삼성각은 도교의 신을 비롯해 불교 이전의 토속신을 한 곳에 모시는 당우다. 불교가 번성하면서 기존의 토테미즘을 흡수하면서 대부분의 사찰에는 맨 뒤쪽에 삼성각. (또는 독성각. 산신각. 삼신각 등 다양한 이름으로)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사찰은 이들을 믿는 무속인들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 정수사에는 여러명의 무속인들이 찾아, 정성을 다해 기도를 해도 크게 통제를 안하는 것 같다. 보통 무속인들은 30분-1시간 가량 기도를 하는 것 같다.

▲대웅보전 좌측으로 관음전. 오백나한전으로 오르는 돌 계단이 있다.

▲돌계단을 다 오르면 범종이 보인다. 보통 범종각을 만들어 설치하지만, 소형사찰들은 이렇게 외부에 설치대를 만들어 범종을 마련해 두고있다.

▲오백나한전 앞에는 정수사 느티나무인 큰나무가 자라고 있다. 큰나무 안내판.

▲큰 나무는 수령이 300년이라고 하지만 둘레가 300년까지는 안되는 듯 하다.

▲오백나한전과 관음전은 같은 당우를 쓴다.

▲오백나한전의 내부 모습이다. 관음전과 같은 당우를 쓰고 있어 관음보살상도 모셔져 있다. 오백나한상이 내부와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오백나한전 좌측으로 종무소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부도가 하나 더 있다.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나 안내문은 없다.부조 글자도 많이 닳아서 한 두 글자만 빼고 읽지못하겠다.

▲오백나한전 앞 나무 틈새로 멀리 강화도 풍경이 보인다.

▲공사중인 관계로 차량 진입로는 현재 통행금지이다. 사찰 차량과 공사차량만 출입가능하다.

▲대웅보전 앞으로는 '마니산 첫절 정수사'라는 타이틀로 스토리텔링을 한 안내문이 있다. 정수약수(석간수)라고 이름 붙이고, 앞에 약사유리광여래불 이라는 석조물을 만들어, 소원을 빌 수 있도록 했다. 정수사 안에는 이런 정수가 두 곳이다.

▲정수(석간수)의 전체 모습이다. 식수인지는 모르겠으나, 바가지를 보니 마셔도 되는 물인 듯하다. 손으로 떠서 맛보니 그렇게 시원하지는 않다.

▲석간수 좌측 바위에는 부조로 글자가 새겨져있다.

▲석간수가 시작되는 부분이다. 저 물이 바위를 타고 내려오니 시원함이 덜 한듯하다. 직접 받아마시면 좀 시원하려나 생각이 들지만, 그러기엔 너무 높은 위치다.


▲약사유리광여래불 이라고 이름 붙여, 사람들이 저 돌구슬을 쓰다듬으며 기도하라고 안내되어 있으나, 들어올리며 기도하는 사람도있다. '약사여래'라 함은 질병을 치료하는 보살이므로, 아픈 사람들이 많이 기도하는 듯 하다.

▲대웅보전 앞 공양간 가는 길 입구에는 정수카페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차. 음료도 팔고, 불교용품(굿즈)도 판매하며, 기도접수도 하는 듯 하다.

▲카페 뒤로도 벤치가 설치되어 있다.

▲정수카페에 붙어있는 학성종사 큰스님과 김지견 박사의 안내문이 붙어있다.

▲공양간이다. 내부에 내실이 있다. 평일에 외부인 공양도 하는지 모르겠으나, 내실에서 주로 사찰관계자나 보살들만 들어가서 먹는 듯하다. 외부에 밥솥에 밥과 국. 식판등을 비치해 두었지만, 먹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휴일에만 일반인들이 많이 공양할 듯하다.

▲공양간에서 주차장으로 가는 둘레길에는 군데군데 구덩이가 있다. 들여다 보지 않았다. 산짐승 밥그릇인가? 아니면 음식물 처리장인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