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시설/사찰

한국의 사찰14. 의왕 청계사

dogyein 2023. 9. 23.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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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의왕시 청계로 475 청계사
 

【개요】

●청계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로경기도 의왕시 청계산 자락에 있는 사찰이며, 1983년 9월 19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6호로 지정.

 

●통일신라시대 때 창건하여(부도나 석등 양식으로 추정) 고려 충렬왕 10년에 중창한, 조선 숙종 15년(1689)에 세운 청계사적기비가 있고 조선 후기의 건물로 보이는 극락보전이 있음.

 

【중창의 역사】

 

●청계사는 1284년(충렬왕 10) 시중 조인규가 막대한 사재를 투입하여 중창하고 그의 원찰로 삼은 뒤부터이며, 이후 100명이 넘는 수도승이 상주하였다고 함(요사채가 현재 3곳).

 

-조인규의 사후 자손들이 여기에 그의 사당을 짓고, 전장과 노비를 두어 대대로 제사를 지냈다고 함.

 

●1407년(태종 7) 조정에서는 이 절을 자복사(資福寺)로 지정하고 천태종에 소속 시켰으며, 1431년(세종 13) 조인규 영당을 중건하였고, 연산군이 도성 내의 사찰에 대한 폐쇄령을 내렸을 때, 이 절은 봉은사를 대신하여 선종본찰의 기능을 행하는 정법호지도량(正法護持道場)이 되었다고 함.

 

●광해군 때는 이 절의 소속 전장과 노비를 모두 관에 소속시켰고, 1689년(숙종 15) 3월 화재로 모든 건물이 불탔을 때 성희(性熙)가 중건.

 

●1761년(영조 37) 정조가 동궁으로 있을 때 이 절에 원당을 설치한 뒤 밤나무 3,000주를 심고 원감(園監)을 두었으며, 1798년(정조 22) 조무의(趙武毅)의 시주로 중창함.

 

●1876년(고종 13) 3월 26일 실화로 수십 칸의 건물이 소실되자 4년 후인 1879년에 음곡(陰谷)이 중건.

 

●일제강점기에는 종교 탄압으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여 이어 오다가 1955년 비구니 아연(娥演)이 주지로 취임한 뒤 중창을 시작하였고, 월덕(月德) · 탄성(呑星) · 월탄(月誕) 등이 그 뜻을 이어 당우를 회복.

 

●2001년 종상스님이 주지로 부임해오면서 절의 격을 일신하고 진입로 불사를 마무리해 대찰의 면모를 갖춤.

 

-성행스님이 주지를 맡아 경허, 만공, 금오, 월산 선사의 부도를 조성하는 등 회주종상스님의 지도아래 민족 문화사적 위상 제고를 위하여 경허 스님등 청계사와 인연을 가졌던 한국불교의 빛나는 고승 4분의 부도탑 조성을 위하여 선종 종찰로서 명실상부한 “ 한국 선불교 중흥 본찰” 로서 거듭남.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 · 산신각 · 종각 · 수각(水閣) · 봉향각(奉香閣) · 대방(大房) 등 10여채가 있다.

 

【중창기여자 조인규는 누구?】

 

●조인규는 평양 상원 지역의 미미한 가문에서 출생하였고, 중앙의 정치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43세 때 세자의 신분이었던 충렬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부터.

 

●조인규는 몽고어 통역관을 뽑는 양성 시험에 합격한 후 상당한 노력으로 몽골어에 정통. 충렬왕이 원나라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자 조인규는 공주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였고, 결국 공주의 세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충렬왕이 즉위하니 조인규의 지위는 점차 향상되었고, 원나라 세조로부터도 신임을 얻어 원나라 관직을 제수받기도 함.

 

●그는 1292년 그의 딸이 세자비로 간택되면서 조정에서 가장 유력한 존재가 되었으며. 1298년 사위인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자 사도시중참지광정원사(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가 되어 개혁 정책을 크게 뒷받침.

 

●그러나 충선왕비인 계국대장공주가 조비(趙妃)를 질투하여 일어난 조비무고사건으로 왕이 7개월만에 퇴위되고 충렬왕이 복위하면서 조인규도 원나라에 끌려가 안서지역에 유배. 그러다가 6년 후인 1305년 방면되어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에 임명되면서 다시 관직에 복귀.

 

●1307년에는 원나라 무종(武宗)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충선왕의 정치력이 복권되었으며, 이에 따라 조인규도 다시 자의도첨의사사 평양군(恣議都僉議司事平壞君)에 봉해지면서 선충익대보조공신(宣忠翊戴輔祚功臣)이 되었다.

 

●말년에 누린 그의 권세는 곧 그의 가문이 튼튼한 세력을 구축해 가는데 밑받침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들은 모두 재상의 지위까지 오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인규가 1284년 청계사를 중창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는 사실은 이후 청계사의 역사에 결정적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만큼의 중요한 것이었다. 이 시기는 조인규의 정치적 활동이 절정에 달해 있을 정도로 막대한 권세를 누리던 때였으며, 그의 권세가 그대로 사찰 중건에 이어졌음을 감안한다면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

 

●특히 그의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사찰 지원에 관심을 보이고 영당(影堂) 관리. 청계사가 오늘까지 그 전통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데는 조인규와 그의 후손들의 영향이 지대함.

 

【배출한 유명한 스님】

 

●경허대선사(1846~), 만공대선사(1870~1946), 보월대선사(1884-1924), 금오선사(1896-1968), 월산대선사(1912~1997) 등이 있다.

 

【주요 성보문화재】

 

●사인비구(思印比丘)가 제작한 동종이 2000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청계사 소장 목판이 1988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신중도가 201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

 

●절 입구에는 201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청계사사적기비(淸溪寺事蹟記碑)와 2014년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청계사조정숙공사당기비(淸溪寺趙貞肅公祠堂記碑)가 있음

 

●극락보전은 1900년대 지은 건물로 안에 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후불탱, 신중탱 등이 봉안.

 

-편액은 작자미상이나 조선 후기 것으로 추정되며, 주련은 4점이 걸려 있음.

 

-극락보전안의 아미타삼존 아미타삼존불은 조선후기 양식으로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이루어져 있음.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은 한 작가의 솜씨로 보이지만, 관음보살상은 양식에서 조금 차이를 나타내며 조성 연대도 다소 올라가는 특징을 보여 줌.

 

-탱화는 모두 18세기 중엽의 설훈 스님 작품으로 가치성이 매우 높은 편. 후불탱 제작 연대는 함풍년간(咸豊年間, 1851∼1861)으로 추정되며,신중탱은 1844년(헌종 10)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

 

●지장전 안에는 지장보살입상이 봉안. 삼성각 옆의 극락보전 왼쪽에 부도가 서 있고 그 뒤로 지장보살입상이 봉안. 1993년에 화강암으로 조성했음.

 

●대형 와불은 1999년 지명 주지가 봉안.

 

●1862년 철종13년 만들어진 괘불(비로자나삼신불)은 궁중의 상궁(尙宮)이던 차씨(車氏)라는 인물이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금어(金魚)는 화남 총사(化南摠舍)와 윤익(潤益) 스님이 그림.

 

●청계사 동종은 현재 보물 제11-7호로 지정되었으며, 1701년(숙종 27)에 조성.

 

-명문에 따라 본래 청계사에서제작한 것이 분명하지만 한동안 봉은사에 봉안되어 있다가 1975년 다시 청계사로 옮겨와 봉안.

●청계사에는 판각되고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14종 466판에 달하는 경판이 소장.

 

【특징】

●청계사는 청계산서 내려오는 계곡을 끼고 있어 주변경관이 아름다운 편이다.

 

●청계사에서는 최근 2000년 10월 극락보전에 봉안된 아미타삼존불 가운데 관음보살상의 상호 횐쪽 눈썹 주변에 우담바라 꽃이 피어 세간에 큰 화제가 되었음.

-우담바라는 높이 1cm의 작은 크기로 모두 21송이가 피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같은 해 10월 6일 ‘우담바라 108일 무차정진 대법회’를 가짐.

 

●청계 계곡 입구에서 약 4키로 정도 계곡을 따라 산으로 오르다보면 꽤 높은 위치에 사찰이 위치해 있고, 고도가 높은 탓이 경사가 큰 3단 구성으로 되어 있다.

 

●사찰과 부도 사이로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이 폭포처럼 흘러내리며, 계곡은 여름철 유명한 피서지로 3-4키로에 이르는 길 양 옆으로 많은 카페와 음식점등이 산재해 있어 일년 내내 찾는 이가 많다.

 

●청계산 자락이므로 등산객이 많은 편이다. 주차장은 그리 넓지 않으며, 사찰 입구에 10여대 가량, 맨 아래 단에 10-20여대 가량 주차할 수 있으나 언제나 많은 차량탓에 길 양옆으로 많이 차를 댄다.

▲청계사 표지석

▲청계사 안내판


▲청계사 주차장쪽에는 작은 계곡이 흘러내린다

▲일주문은 없고, 청계사로 가는 입구 계단 좌우측에 사천대왕이 2개씩 있다.

▼청계사 입구 돌계단(좌우로 2개씩 사천대왕상)

▲계단에 올라서면 당우들이 보인다.

▲경내로 들어서면' 설법전'이 보인다( 안에서 봤을때)

▼같은 건물인데 밖에서 보면 현액이 '만세루'로 다름 이름이 적혀있다.

▲설법전 안의 불상

▲만세루를 측면에서 본 모습

▲경내 진입 전 우측에는 부도와 공덕비등이 많다,.

▲오래된 듯 보이는 조정숙공사당기비의 앞.뒤면과 안내문

▲청계사 사적비

▲청계사 사적기비와 안내문

▲성림당 월산대종사비문과 부도(아래)

▲금오당태전대종사부도와 비문

▲보월당성인대선사 부도와 비문

▲만공당 월면대종사 부도와 비문

▲경허당 성우 대종사 부도와 비문

▲공덕비 4기

▲자비광명등불사공덕비

▲조정숙공사당비

▲중창에 기여한 조명호 박한선 공덕비(평양조씨 후손이라고 하네요)

▲공덕비 인데 글자가 안보입니다 ㅠ

▲경내 우측진입로에서 본 만세루

▲설법당: 예불 중이다.

▲경내에 처음 올라서면 나오는 전경

▲선불장( 요사채 같음)

▲선불장 역시 2층 구조로 아래층은 다른 용도로 쓰인다

▲풍경은 아닌듯 하다.

▲풍경(종과 고기모양이다)

▲사찰 기와지붕에 나무 싹이 자라고 있다

▲석탑 같지는 않고 문양같은게 있는 것으로 보아 부도같다.

▲야외에 설치된 불상

▲소각장

▲오래된 사찰 답게 고목들이 꽤 많다.

▲영산전 현액

▲영산전 불상

▲청계사에는 불교 굿즈가 굉장히 많은 편이다. 모두 천개정도는 되어 보인다.

▼눈에 띄는 불교 굿즈들만 찍어봤다.

▲삼성각

▲삼성각 내부의 산신도

▲삼성각 내부 산신도와 불상

▲청계사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와불상이다.

▲와불상 옆에는 시주자의 명단과 발원문이 새겨져 있다. 국난극복. 민족화합.세계평화. 법륜상전 이라고 적혀있다.

▲열반상(와불) 공덕비문이다

▲와불 기단 아래는 황금불상 수백개가 모셔져 있다.

▲범종각

▲청계사 동종과 안내문

▲지장전

▲지장전 불상과 탱화

▲지장전 측면(제사를 지내고 있다)

▲지장전 전경

▲극락보전 단청

▲극락보전 불상 삼존불

▲극락보전 불화

▲극락보전 처마와 서까래

▲극락보전 기단과 전경

▲영산전 전경

▲경내에 연꽃이 몇개 피어있어 찍어봤다

▲종무소와 요사채

▲약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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