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찰58- 강화도 전등사
※전등사는 대형사찰로서 사진과 글이 많습니다.
【개요】
●전등사는 워낙 유명한 사찰이다. 강화도에 위치한 대형 사찰이며, 동시에 유명한 문화유산 관광지이기도 하여 연중 내내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찰은 상당한 고찰이 많기 때문에 종교시설이자 문화유산을 돌아보는 관광지로서 자리매김 하고 있는 사찰이 많이 있다.
●전등사 또한 그러한 사찰 중의 한 곳으로, 거의 모든 사찰이 금지하는 반려견 동반도 조건부 허용하는 사찰이어서 더욱 찾는 이가 증가하고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 근처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의 말사이다. 강화도 남부 정족산 정족산성 안에 있는 사찰로 원래는 경기도 사찰이었으나, 1995년에 강화도가 인천광역시로 편입된 뒤로는 인천 소속 사찰이 되었다.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시절 아도화상이라는 승려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때 수축하였다가 17세기 초 광해군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고 일제강점기 때 중수된 적이 있다. 소수림왕 시절 지어진게 문서나 기타 증거로 제시되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임이 인정될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고려시대부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로서 중하게 여겼고, 정화궁주가 절에 대장경과 함께 옥으로 만든 법등을 기증하면서 사찰명을 진종사(眞宗寺)에서 전등사(傳燈寺)로 바꾸었다. 옥등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정화궁주는 본래 충렬왕의 왕비였으나,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에게 밀려 둘째 비로 강등당하여, 제국대장공주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하며 살았던 비운의 여인이다.
●전등사는 1605년과 1614년 큰 화재로 타버렸으나 재건하여 1621년에야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왕실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고, 1719년(숙종 45)부터는 주지승을 도총섭으로 임명하여 우대하였다.
●1726년(영조 2) 영조가 직접 전등사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을 쓰고, 1749년(영조 25) 중수불사에는 목재를 시주하여 이때 지금의 대조루의 모습으로 지었다.
●1909년 보관중이던 실록을 서울로 옮겨 사고로서의 지위를 잃었으나, 강화와 개성의 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현재도 사고 당우는 그대로 남아있으나, 내부에는 실록은 부재하다.
●전등사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피해를 보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정족산성 외부의 암자와 건물들이 프랑스군의 방화로 사라지고, 불상과 법전 등 문화재가 약탈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곳이 관군과 프랑스군의 교전지였으며, 전등사 경내에 관련 장소와 사료들이 남아있다.
●대웅전에 들어가 보면 얼핏 낙서처럼 보이는 묵서(墨書)들이 곳곳에 적혀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병인양요 당시 참전했던 조선군 병사들의 이름이다. 프랑스군과의 교전을 앞두고 전쟁에서 이기고 또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빌면서 병사들이 대웅전 불단이며 기둥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고 전한다.
●오래되기도 했지만, 180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에 여러 사건도 많이 겪었고, 왕실과 관련을 맺기도 했던 사찰인지라 문화유산도 상당히 많다. 임금이 직접 쓴 현액도 있다고 하니 더욱 그럴 것이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보물 제178호 강화 전등사 대웅전, 보물 제179호 강화 전등사 약사전, 보물 제393호 강화 전등사 철종, 보물 제1785호 강화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보물 제1786호 강화 전등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보물 제1908호 묘법연화경 목판(2016)등 보물급만 6개가 있다.
●이밖에 지자체인 인천시 유형문화유산도, 제43호 강화 전등사 약사전 현왕탱, 제44호 강화 전등사 약사전 후불탱, 제46호 강화 전등사 청동수조, 제47호 강화 전등사 업경대, 제48호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수미단, 제57호 강화 전등사 약사전 석불좌상, 제81호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신중도, 제82호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후불탱, 강화 전등사 강설당 아미타불탱, 문화재 자료 제7호 강화 전등사 대조루 등이 있다.
●보물중 철종은 유일한 중국종으로 우리나라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원래는 허난 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었고, 해방 후 인천의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하여 전등사로 옮겨졌다. 어떻게 한국으로 오게 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말에 쇠붙이를 강제 수탈하던 때에 중국에서 반입한 것이 일본의 패망이후 낙오되어 인천에 남지 않았는가 추측이 있다.
●또 다른 증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말 당시 전등사의 원래 범종이 공출당했고, 해방이 되자 주지스님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천 항구를 뒤지고 다녔는데 누군가 '부평 군기창 뒷마당에 종이 하나 있더라.' 하고 알려주었다. 주지는 어차피 주인 없는 채로 군기창에 버려졌다면 곧 녹여져 무기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가져왔고 현재까지 전등사에서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물 178호 대웅전에는 보물 1785호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 있고 좌상의 위에 극락조와 용등을 장식한 닫집이 화려하다. 건물바깥 추녀의 네 귀퉁이의 나부상(裸婦像)이 유명한데, 관련 설화가 전해진다.
광해군 시절 화재로 소실된 대웅전을 재건축하던 목수가 절 아래의 주막 주모와 눈이 맞아 돈을 맡겨두었으나 주모가 돈을 들고 튀었고, 이에 목수가 "주모는 영원히 무거운 대웅전 지붕을 떠받치면서 속죄하라, 다른 사람들은 이를 보고 여색을 경계하라"는 뜻에서 만들어 넣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관련 기사 또는 정화궁주를 질투하고 핍박한 제국대장공주를 비판하기 위해, 제국대장공주를 나체로 조각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네귀퉁이에 각각 처마를 떠받드는데, 웃는 표정과 우는 표정이 있고 그중 하나는 두 손이 아닌 한 손만 들고 있으면서 눈이 파랗게 칠했음이 특이하다. 파란눈은 불교미술에서 나찰의 특징이다.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추녀를 지지하기 위한 야차상으로 다른 절에서도 유사한 형태가 보이는 조각상이라고 한다.
●전등사의 명물인 은행나무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던 조선시대, 전등사도 예외없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관리들과 토호들의 토색질이 심해서 젊은 스님들은 강화성을 쌓는 데 사역을 나가고, 늙은 스님들은 종이를 만들어 바쳐야 했다.
●거기에 더해 전등사에 있는 2그루 은행나무 때문에 매년 조정에 은행을 바치는 역할을 해야만 했는데, 남는 게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스님들은 이것 또한 수행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관가에서 '조정에 진상할 전등사 은행알의 양을 크게 늘리겠다.'며 20가마니를 요구했다. 안 그래도 은행알을 있는 대로 다 털어도 10가마니밖에 안 될 판에 20가마니를 바치라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많은 은행알을 구해서 바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조정에 상소를 올린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탁발해서 모자란 양을 보충하자니 '좋은 은행은 승려들이 다 먹고 탁발한 은행들만 진상했다.'고 트집잡힐 게 뻔하니, 이래저래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고심 끝에 신통력이 있는 백련사의 추송 스님을 불러와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다.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도착하자, 전등사 승려들은 은행나무 아래에 단을 쌓아두고 3일기도를 올릴 준비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드디어 3일기도가 시작되었는데, 전등사 안은 소문을 듣고 구경을 하러 온 강화도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어느샌가 관속 몇 명이 소문을 듣고 나타나서 구경꾼들의 틈에 끼다가, 그 중 한 사람이 "공물을 진상 하기 싫다고 저주를 퍼붓는 거 아니냐"고 노스님에게 시비를 걸었다.
스님은 "어허, 어찌 그런 무엄한 말을! 상감께 진상할 은행이 곱절로 열리게 기도하는 것이오." 하고 답했다.
●그 관속이 비웃으며 "그런다고 은행이 더 열릴 것 같은가" 라고 비아냥 거리자, 갑자기 "악"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감싸쥐고 땅바닥에 나자빠졌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니, 그는 한쪽 눈이 퉁퉁부어 실명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소문이 퍼지자 구경꾼이 더 모여들었다.
●드디어 마지막 사흘째, 기도가 거의 끝나자 목탁과 바라 소리가 일제히 멈추고 염불 소리도 멎어 전등사에 적막이 흘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추송선사가 은행나무를 향해 "오늘 3일기도를 마치며 이 은행나무 2그루가 100년이 지나도 1000년이 지나도 영원히 열매 단 한 알도 맺지 아니하기를 축원하나이다."고 낭랑한 목소리로 기도를 끝맺었다.
●이를 듣고 있던 승려들과 구경꾼들은 더 열리게 해달라는 내용과 반대의 기도를 듣고 놀랐다.
" 은행을 곱절로 열리게 하는 거 아니었나?"고 어리둥절해 하는데 별안간 하늘이 어두워지고 요란한 천둥번개와 함께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며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우수수 떨어졌다. 시간이 지나 비바람이 그치고 하늘이 개자 은행나무 쪽을 보니 추송선사와 노승(老僧), 동승(童僧)은 온데간데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날 이후 은행나무 2그루는 은행을 맺지 않게 되었고 관가의 탄압도 없어졌다. 그리고 오늘날도 은행을 맺지 않는 은행나무들은 노승나무와 동승나무로 불린다.
관련 내용은 은행나무 옆에 안내판으로 적혀있다.
【당우】

●당우들도 창건 이후 지속적으로 중수가 이어졌다.
1800년대 이후만 봐도 1871년(고종 8) 포량고를 이 절에 건설하였고, 1872년 승군(僧軍) 50명과 총섭 1명을 두고 진상약애고와 산성별장소를 절 남쪽에 건설하였다. 1876년에는 효월(孝月)이 대웅전과 약사전을 중수하였으며, 1884년 3월 영담(映潭)이 관음암을 중수하였고, 1905년 주지 서룡이 비로전의 불상과 약사여래 및 칠성탱을 개금불사하였다.
●1912년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강화 · 개성 등 6개 군에 소재하는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지는 김지순이었고, 2대 주지는 국창환이었다.
●1915년 국창환은 국고보조를 얻어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916년 신도들의 기부금으로 시왕전과 대조루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1928년 3대 주지 이지영이 지장상을 개금하고 명부전을 다시 세우는 한편, 적묵당 30여 칸을 수리하고, 식당 26칸의 기와를 바꾸는 대불사를 이룩하였다.
●1932년 6대 주지 이보인이 국고보조금과 신도의 기부금으로 대웅전과 극락암을 중수하고, 적묵당 · 강설당 · 대조루 · 명부전 · 극락암 등을 중건하였다. 8대 주지 김정섭은 1934년 전문강원을 설립하고 안진호에게 부탁하여 사료를 모아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를 편찬, 발행하였다.
●1973년에 적묵당을 해체 · 복원했으며, 1977년 명부전을 해체해서 이전하고 종각을 신축하였다. 1979년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1986년에 극락암과 삼성각을 해체 및 증 · 개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절부지가 워낙 커서 당우를 다 보기 위해서는 남문으로 진입하는게 낫다. 남문으로 진입할 수도 있고, 전등각 동문 쪽으로도 진입할 수 있다. 당우는 대부분 남문쪽으로 진입하는게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요즘같은 폭염에는 어느 방향에서 진입하건 사찰을 꼼꼼히 살펴보기에는 지치고 힘이 들 정도로 사찰이 크다.
사찰 내부에는 은행나무등 고목들도 즐비하여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특징】
●전등사는 작은 산같은 구릉 하나에 걸쳐 있는 사찰로, 동문과 남문 두 개의 출입문이 있다. 주요 당우들은 대부분 남문 쪽에서 접근성이 좋아 그리로 오는 것이 좋다. 산성을 따라 남문과 동문을 통과하여 산성 안쪽으로 사찰이 위치한다. 동문 위로는 수목장도 있는 듯 하다.
●전등사는 한때 한용운과 만공의 상좌인 춘성이 주지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방송 촬영도 적잖이 하는 사찰이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요즘은 드라마나 영화, 방송 등 미디어에 나오면, 사찰측에서 대대적으로 홍보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문화재 관람료가 폐지되었으나, 주차료가 2천원(소형)이라고 안내되고 있다. 이 주차료는 문화재 관람료를 받던 시절에도 있었다. 문화재 관람료 폐지 이후 주차를 갑자기 유료로 전환하여, 주차료를 받는 다른 사찰보다는 싸고 부담이 덜하다. 새로 관람료를 받는 사찰을 보면, 2시간 가량 사찰을 구경한다고 본다면 5천원 안팎으로 결코 싸지 않아,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안든다.
●간혹 일부 방문객들이 사찰을 구경하다가, 동문에서 넘어와 남문 주차장에서 차를 찾는 경우가 있다. 반대인 경우도 마찬가지로 있다. 그러면 다시 본인의 차량이 주차된 곳으로 넘어가기가 수월치 않으니 차량을 주차한 곳이 어느 주차장인지 잘 기억해 두고, 사찰을 돌아 보는게 좋다.
●전등사는 워낙 오래되고 규모가 큰 사찰이라, 여러 가지 설명도 많아서 기록이 상당하다. 사찰 자체는 물론이고 각 당우들에 대한 설명도 많이 필요하지만 이즘에서 접고, 사찰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상세한 설명을 볼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템플 스테이도 하고 있지만,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 은 듯하다. 사고지 쪽 등 사찰 내부에는 공사를 진행중이다(8월16일 기준). 대웅전 근처와 아래 찻집 근처가 사람이 제일 많고, 산쪽으로 갈 수록 한적하다. 머리를 식히러 왔다면, 템플스테이 뒤쪽이나 삼성각 뒤쪽이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이다.


▲남문주차장에 차를 대고 약 100미터 가량 오르면, 종해루라고 현액이 적힌 남문이 나온다.

▲남문 옆으로는 석축으로 산성을 쌓은 삼랑성이 이어진다.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산을 따라 쌓아졌으며, 경사가 꽤나 가파르다.

▲삼랑성 안내문

▲종해루 현액

▲종해루 사적지정 기념비

▲내부에서 본 종해루

▲해우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듯 하다.

▲남문 좌측에 있는 부도군

▲부도군에 있는 부도탑과 비

▲글자가 다 닳아서 누구의 부도인지를 알기 힘들다

▲인공당 대강백부도

▲노근선사의 부도

▲서운대종사탑비
▲인공당대강백의 탑비


▲보호수 큰나무와 안내판


▲보호수 은행나무와▼안내판

▲보호수 은행나무와 안내판

▲보호수 은행나무와 관련된 설화를 적은 안내판

▲진무중군 이공용의 애휼승도비영세불망비

▲찻집 죽림다원

▲죽림다원 앞의 조형미술품

▲대조루 외부 현액은 전등사라고 적혀있다.

▲대조루 외부의 모습이다.

▲대조루 내부의 모습이다.
▼대조루 안내문


▲대조루 현액이다.


▲▲대조루 옆에 있는 단풍나무와 ▲ 안내판이다.

▲대웅보전이다. 현재 수리중이다.

▲수리하지 않았을때 찍었던 사진

▲대웅전 삼존불상과 탱화이다.

▲대웅전 주불상의 닫집이 화려하다.


▲대웅전 내부는 단청작업을 했던 것이 모두 색이 바래진듯하다. 굉장히 고풍스러운 목재건축의 미를 보여준다.

▲대웅전 측면의 모습이다.



▲관음전 전경과 현액이다.

▲관음전의 관음보살좌상이다.

▲관음전의 탱화이다.,

▲종루의 모습이다.
▲종루에 설치되어 있는 목어

▲종루에 설치되어 있는 법고

▲종루에 설치되어 있는 범종

▲종루에 설치되어 있는 운판


▲전등사 느티나무와 안내판

▲뭐하는 곳인지? 소원을 적은 종이를 묶는 데인지?

▲약사전 전경


▲약사전 내부 문화재 안내판

▲약사전 석불좌상과 후불탱이다.

▲약사전 현왕탱

▲약사전 문화유산 지정비

▲명부전 전경

▲경내 명부전 앞에 설치된 석불부조상이다. 현대 작가의 미술작품이다.

▲명부전 목조지장보살 삼존상및 시왕상일괄 안내판이다.

▲명부전의 지장보살 삼존상

▲명부전 시왕상
▲명부전 탱화와 출입구 앞의 사천대왕

▲명부전 탱화

▲명부전의 시왕상

▲명부전 시왕및 사천대왕

▲명부전 현액이다.

▲삼성각 전경

▲삼성각의 현액

▲삼성각 독성도

▲삼성각 칠성탱화

▲삼성각 산신도

▲삼성각에서 내려다 본 전경

▲경내 마당에 작은 탑 모양의 굿즈가 있다.

▲월송요(요사채 건물) 아래층은 무설전이다. 단차를 이용해 건물을 지어서, 여기서 보면 단층이다.

▲월송요 출입문

▲주요 당우들이 모여있는 곳 전경

▲사찰의 왼쪽 산등성이에 강화의병 전투지 안내판이 붙어있다.
▲▼강화의병 전투지 위치다


▲전등사 팥배나무 안내판이다.

▲전등사 팥배나무

▲강화 전투지 쪽에서 내려다 본 사찰

▲강화 전투지 언덕에 공중전화기 박스가 놓여있다. 고민을 털어놓는 전화인가? 아니면 다신 볼수 없는 부모.가족들에게 하고싶은 말을 하라고 만들어 놓은 것인가?

▲정족산성 진지 안내판



▲정족산 사고지와 안내판

▲사고지 내부의 장사각

▲장사각에서 내려다 본 전경

▲장사각 현액

▲사고지 내의 당우 선원보각

▲사고지 앞은 포토존으로 알려져있다.


▲취향당 (현재는 수리중이다)

▲예전에 찍은 취향당 전경


▲템플스테이 하는 곳이다.

▲강설당 전경: 여긴 각종 불교용품등을 파는 곳이다.

▲강설당의 외부 모습이다.

▲종무소는 수리중. 임시 종무소가 대조루에 마련되어 있다.

▲▼선불장: 스님들의 전용공간이다. 강설당 뒤에 있다.


▲선불장도 단차 이용해서 2층으로 지어졌다. 아래쪽은 공양간으로 쓰이는 듯하다.

▲공양간 옆에는 늘 장독대가 있다.


▲무설전과 무설전 간판. 그림이있는 법당이로 부제가 붙어있다.
▲무설전 내부는 벽쪽으로는 작가의 작품이 있고, 안쪽으로는 여러 불상을 모신 법당이 있다.





▲무설전 내부의 다양한 불상들

▲무설전 내부의 징

▲무설전 내부의 탱화

▲무설전에서는 8월 말까지 이성재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다,

▲무설전 입구의 간판


▲정족산성

▲약수가 사찰 중앙에 있으나 식수로 먹기엔 꺼려진다. 담겨진 물을 먹지말고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 먹는 사람이 많다.

▲철종이다. 이 철종은 중국에서 넘어온 종이다. 우여곡절 끝에 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았다.

▲죽림다원에서 호박주스 같은 것과 약과를 두개 사먹었다. 덥기도 무척덥고, 출출하기도 해서....

▲내려오다가 다시한번 들른 죽림다원의 분위기는 좋다. 내부는 시원하지만 많은 사람이 외부에서 자연의 바람을 맞고있다.



▲사찰 내부의 다양한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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