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찰37- 여주 신륵사
【개요】
●여주 신륵사는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의 남한강변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봉미산을 끼고 있으나, 강변에 위치해 사찰이 대체로 평평한 편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절 이름인 '신륵(神勒)'에서 륵(勒)은 굴레를 뜻한다. 고려 우왕 때 인근의 마암(馬巖)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행패를 부리자 미륵불 또는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이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신륵사란 절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1376년, 고려말의 고승 나옹은 회암사의 주지로 중창불사를 했다가 탄핵을 받아 유배를 떠났는데, 유배길에 신륵사에 들렀다가 그대로 입적하였다. 나옹의 제자들은 스승을 그대로 신륵사에서 화장한 뒤 나온 사리를 회암사와 신륵사에 나누어 부도탑(보제존자석종)을 조성했다.
●조선불교계는 나옹의 스승인 범승(인도 승려) 지공(指空), 나옹, 그리고 두 승려의 공동제자인 무학을 3화상(三和尙)이라고 부르며 불교의 조사(祖師)로 추앙하였고 민간신앙의 대상으로도 여겼다. 그리하여 나옹이 입적한 신륵사에도 조사당(祖師堂)을 세워 3화상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양주 회암사에 가도 조사전에 이들의 진영을 모신 조사당이 있으며, 조사전 뒤 언덕에 부도도 있다. 특히 무학대사의 부도는 보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1469년(예종 1년)에 세종의 영릉이 여주로 이장됐는데 이때 영릉의 원찰(願刹, 능침사찰)에 대한 얘기가 나오다가 신륵사를 원찰로 하자는 건의가 나와, 왕실의 발원으로 1472년부터 대규모 중수를 시작했다. 이때 절의 이름을 보은사(報恩寺)로 바꾸기로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계속 신륵사로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는 천년 고찰 답게 보물이 많다. 문화재 관리사무소가 따로 있을 정도로 많다.
▲보물 내역을 보면 보물 제180호 여주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225호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6호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8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9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30호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1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1791호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 석조부도가 있다.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유형문화재 제277호 여주 신륵사 건륭삼십팔년명 동종▲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8호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삼장보살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 여주 신륵사 원구형 석조부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6호 여주 신륵사 청동시루▲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67호 여주 신륵사 삼화상 진영등이 있다.
●신륵사 다층전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전탑이며 동시에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전탑이다. 모전석탑까지 범위를 넓혀도 경기도에서는 이 탑이 유일하다. 이 전탑은 화강암으로 7단의 기단부(基壇部)를 만들고 그 위에 벽돌로 6층의 탑신을 만든 후 옥개석(지붕돌)을 올려둔 형태인데 6층전탑이 아니라 다층전탑인 이유는 현재의 모습이 원형이 아니고 변형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전탑 인근에 신륵사동대탑수리비가 있는데, 이 탑의 이름은 원래 나옹탑(懶翁塔)이었다고 되어있다. 나옹은 1376년 신륵사에서 입적했기 때문에 따라서 그의 이름이 붙어있는 이 탑은 나옹의 입적 후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세워졌다고 볼 여지가 있게 된다.
●또한 성화(成化, 1465~1487), 만력(萬曆, 1573~1620) 연간에 수리를 했다는 기록과 1726년(영조 2년)에 벽돌을 다시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이 탑이 최소 3번은 수리가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탑을 쌓을 때는 보통 홀수(3, 5, 7, 9) 층으로 쌓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이 탑 역시 원래는 5층 또는 7층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 조사당, 명부전, 심검당, 적묵당, 봉향각, 칠성각, 범종각, 구룡루. 삼성당 등이 있다.
【연혁】
●신륵사는 창건후 주목받지 못한 절이었으나 나옹이 머물면서 규모도 확장되고 명찰로서 성장했다. 나옹이 입적한 3개월 뒤인 1376년(우왕 2) 8월 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때 대전(大殿) · 조당(祖堂) · 승당(僧堂) · 선당(禪堂) · 종루(鐘樓) · 동익당(東翼堂) · 서익당(西翼堂) · 남행랑(南行廊) · 향적당(香積堂) 등의 많은 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되었다. 그리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도 건립되었다.
●1382년에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대장경 불사(佛事)를 발원한 것은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계승하여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신륵사의 승려 무급(無及)과 수봉(琇峯)이 중심이 되고 그 제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시주를 모았는데, 200여 명이 이 불사에 참여하였다.
●이 중에는 각운(覺雲) · 신조(神照) · 자초(自超) 등의 고승들과 최영(崔瑩) · 조민수(曺敏修) · 최무선(崔茂宣) 등의 이름이 나온다. 1381년에 각주(覺珠)가 금자(金字)로 제목을 쓰고 각봉(覺峯)은 황복(黃複)을 만들었으며, 12월에 성공(性空)이 함을 만든 뒤 1382년 정월에 화엄종 소속 사찰인 영통사(靈通寺)에서 교열한 다음 4월에 배에 실어 신륵사에 봉안하였다.
●또한, 대장각 안에는 대장경과 함께 권희가 조성한 비로자나불상과 홍의룡이 죽은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보현보살상, 그리고 강부인(姜夫人)이 시주를 얻어 조성한 문수보살상을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기세를 못피다가 광주의 대모산에 있던 영릉(英陵)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중건하였고, 1700년(숙종 26)에는 위학(偉學)과 그의 제자 우안(宇眼) · 천심(天心) 등이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1726년(영조 2)에는 영순(英淳) 등이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1796년(정조 20) 영돈녕 김이소와 예조판서 민종현 등이 중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범중각(泛中閣) · 식당을 지었으며, 가자첩(嘉資帖) 50여 장을 하사받았다. 1858년(철종 9)에는 순원왕후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하여 불전(佛殿) · 선료(禪寮) · 종루 등을 중수하였고, 1929년에는 주지 성인(性仁)이 명부전(冥府殿)을 중수하였다.
【특징】
●신륵사는 남한강을 접하고 있고 주변의 경치가 좋아 둘레길이 굉장히 길게 조성되어 있다. 신륵사 입구 쪽도 황포돛대를 타는 곳이 있고 놀이 시설 공사도 하는 등 국민관광지로 주변이 조성되어 있다.
●따라서 출입구가 몇군데 있으며, 일부는 길을 막아놓아 잘 찾아야 한다. 여주가 도자기로 유명한 탓인지 곳곳에 도자기 관련 시설이나 판매처들이 많이 보인다. 대체로 모든 당우가 평지에 있으며, 탑이나 부도. 비석 같은 것들만 뒤편 산이나 언덕에 조성되어 있다.
●특히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 보호수는 신륵사를 상징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가을에 온다면 신륵사 또한 인근 강천섬과 함께 멋진 풍경을 감상할 곳이 될 것이다.

▲일주문. 봉미산신륵사라고 현액이 걸려있다.


▲불이문에 그려진 사천대왕


▲일주문을 지나면 불이문이 나온다.

▲템플스테이 하는 곳 옆에 당우가 있는데 용도는 모르겠다. 보통은 이런 건물은 요사채로 쓰인다

▲템플스테이 하는 곳

▲일주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있는 누각. 현액이 없어 이름은 모르겠다. 올라서도 나무가 가려 한강이 정면으로 보이지 않는다.

▲경내 입구에 있는 구룡루.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초창기 구룡루 모양과 많이 다르다. 구룡루라는 이름은 석가모니 탄생 때 9마리용이 물을 뿌려 부처님을 목욕시켰다는 경전내용과 신륵사가 창건될 때 커다란 연못을 메우고 그곳에 살던 9마리 용에게 항복을 받고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전설과 연관된다.

▲구용루 측면. 비가완서 렌즈에 습기가 찬 듯 뿌옇다.

▲구용루 현액

▲구용루 안쪽엔 문귀가 적힌 현액이 걸려있다.


▲구용루 좌측으로 있는 범종각. 1층은 불교용품 판매점이며, 누각에는 법고. 범종. 운판. 목어ㅕ등이 있다.,

▲범종각 법고

▲범종


▲신륵사 범종각에는 목어가 두마리 있다.

▲법고 측면

▲범종각 운판. 운판 역시 두개다.

▲범종각 현액

▲관음전

▲관음전 현액

▲관음전 불상

▲관음전 내부 탱화


▲관음전 앞에는 커다란 향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자태가 멋지다.

▲봉송각

▲봉송각 현액

▲봉송각 내부

▲봉송각 안내판

▲소각장. 영가의 물품을 소각하는 곳이다.

▲명부전

▲명부전 안내판

▲명부전 내부 전경

▲명부전 주불인 (사진기준) 지장보살(중앙)과 무독귀왕(좌) 도명존자(우)

▲명부전 현액




▲명부의 시왕들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 누군지 모를 신륵사의 옛 스님의 부도

▲원구형 조승탑

▲팔각원당형 석조승탑. 이 것 역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부도이다.

▲팔각원당형 석조승탑

▲뒤 언덕서 내려다 본 신륵사

▲조사당. 조사당 또는 조사전은 사찰의 덕이 높았던 주지들 진영을 모시는 당우다.

▲조사당 안내판

▲조사당 현액

▲삼화상진영 안내문

▲불단 뒤에 액자처럼 걸려있는게 삼화상이다.가운데 지공. 오른쪽 나옹. 왼쪽 무학대사다.

▲건륭삼십팔년명 동종. 조사당안에 있으며, 크기는 작다.

▲건륭삼십팔년명 동종

▲보제존자석종으로 오르는 계단

▲보제존자석종 안내문. 조사당 뒤쪽 산에있다. 보제존자 나옹의 사리탑이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보제존자석종...부도의 주인인 나옹은 원래 양주 회암사 주지였으며, 왕명으로 밀양으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머물다 1376년 입적하였다. 이후 제자들이 우왕5년에 이 석종을 만들어 세운것이다

▲보제존자석종비안내문. 이 비석또한 석종. 석등과 함께 각각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보물 지정을 알리는 비석


▲보제존자석종비의 앞뒤면. 비문은 목은 이색이 지었고, 글은 한수가 썼다고한다.

▲보제존자석종앞 석등 안내문

▲보제존자석종앞 석등

▲보베존자석종 전경

▲삼성각

▲삼성각 안내문

▲삼성각현액

▲삼성각 내부 칠성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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