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찰47- 원주 영천사
【개요】
●원주 영천사는 강원도 원주시 태장 1동 122-1 태장중학교 옆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도심에 위치하고 있고 당우가 서너개에 불과한 작은 사찰이지만, 그 역사와 사찰이 지닌 가치는 어느 산속의 고찰보다도 크다 할 것이다.
●기록으로서 사찰의 창건연대는 나오지 않으나 사찰에서 발견된 문화유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시대까지 올라간다. 고려시대의 유명한 승려인 나옹선사는 전국에 그가 창건한 사찰이 매우 많은데 그중 하나가 바로 원주 영천사이다.
●나옹선사가 창건당시 지은 사찰이름은 영전사(令傳寺)였으나 그 뒤 절 부근에서 신비로운 샘물이 솟는다고 하여 영천사로 바뀌었다. 고려 말 승려 혜근(惠勤:1320∼1376)이 이 절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그가 입적하고 난 뒤 1388년(고려 우왕 14)에 사리탑이 세워졌다.
●이때부터 조선 중기까지 원주 지방에서 가장 큰 절로 번창했다. 그러나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세가 크게 기울었으며 그렇게 잊혀진 작은 사찰로 이어져 오다가 , 1938년 박처사(朴處士)가 꿈을 꾸었는데, 부처가 절을 지으라고 하여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영천사로 바꿔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50년 6·25전쟁으로 절이 다시 불에 탔으며, 1958년 김종길이 대웅전을 중건하고 이후 선광(善光) 등이 불사를 계속 진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현재도 사찰 인근을 절골이라고 한다니, 사찰의 규모가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사찰에는 원래 석탑(1915년에 영전사지(令傳寺址) 보제본자(普濟尊者. 나옹화상) 사리탑 2기. 천수사 삼층석탑 1시)과 석불상(석조 비로자나불상)등이 있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과 춘천박물관등에 보관되어 있을 정도로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을 보유한 사찰이다. 비록 사찰 현장에는 그 문화유산이 없지만, 만약 지금도 있었다면 영천사의 규모는 매우 커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탑의 명칭은 영전사지 보제존자사리탑이라고 전해지나, 이에 대한 논란이 많다. 일제 강점기 이전된 탑으로 조선총독부가 1914년 발행한 '조선고적조사약보고'에 기술된 명칭이지만 '영전사(令傳寺)'라는 사찰 이름은 '조선고적조사약보고'와 1920년 역시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고적도보' 외에 현재 전해지는 어느 문헌이나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다. 때문에 태장동에 위치한 영천사(靈泉寺)가 원래 석탑이 있던 곳이며 원주 영천사 보제존자탑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영천사에는 영험한 샘물과 배례석. 그리고 광배가 대웅전을 새로 짓는 과정에서 발견되어 현재 경내에 설치되어 있다. 배례석은 1.23m×0.6m의 규모로 전후면에는 4구의 안상(眼象)이 있고, 양측에는 2구씩의 안상이 있으며 상면에는 연화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배례석의 용도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서울로 이건된 보제존자(普濟尊者) 사리탑(舍利塔)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광배는 최근에 신축중인 대웅전 공사시에 출토된 것으로 두 개의 광배가 여러 조각으로 깨진 상태로 출토되었다. 현재는 출토된 것을 토대로 완성된 형태로 새로 제작한 것이다.
●현재 당우는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 등이 있으며, 광배가 세워져있다. 요사채 맞은 편엔 2층의 큰 건물이 있는데 예전에 30여명의 어린이들이 있던 유치원이었다고 한다. 주지스님이 오갈데 없는 어린아이들을 거둬 키우시고, 학교까지 모두 다니게 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시절이 바뀌어 아이들도 없고, 건물을 다른 용도로 쓴다고 한다. 약사전으로 쓰고 있다는 말도 있다. 딱히 현액이 없어서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약사전은 질병을 고치기 위해 기도를 하는 곳이다.
【특징】
●대로에서 태장중학교 옆을 끼고 들어서면 사찰 진입로이다. 오르다보면 우측에 음식점이 하나 있고 100미터 가량 오르면, 사찰 입구가 나온다. 입구를 들어서면 좌측에 연못이 하나있고 계절이 계절인지라 연못엔 연꽃이 가득 피어있다. 아직 꽃은 없다.
●사찰 입구 오른쪽에는 샘물과 용머리 모양의 물이 나오는 곳이 있다. 지금은 문을 만들어 닫아 놨다. 사람들이 밤낮으로 와서 퍼가고, 심지어는 세차까지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한다.
식수로 가능한 암반수이고, 물맛이 좋기로 소문나다 보니 그런 듯 하다.
●현재는 문을 닫아놔서 주변에 이끼만 잔뜩 머금고 외관상으로는 먹을 수 있는 물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부 암반석 한쪽으로는 물이 일정 수위로 차면 옆으로 흐르게 만들어놔서 물이 넘치는 일은 없다고 한다.
●아마도 샘물 옆에 있는 용머리 모양 쪽으로 넘치는 모양이다. 용머리 모양 우물터도 현재는 사용중지다. 일각에서는 1군 사령관이 매일 이물을 떠갔다고 할 정도이다.
●보제존자는 나옹화상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고려 말 보우(普愚)와 함께 조선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운 고승(高僧)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양주 회암사와 여주 신륵사에 그의 사리탑이 있으나 제자들에 의해 원주에도 따로 사리탑을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찰 주차장이다.


▲주차장에서 보이는 건물은 예전에 주지스님이 오갈데없는 여자아이 30여명을 키우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 아이들을 고등학교또는 대학교까지 보내셨다니 대단하신 듯하다. 지금은 시대가 변하여 그런 아이들이 많지 않아, 다른 용도로 쓴다고 한다. 약사전으로 쓰인다고 하나 별다른 현액이 보이지 않아 들어가보지 않았다.

▲사찰입구에 세워진 안내판. 전통사찰 6호이며, 영천사를 대표하는 나옹선사의 부도탑 2기와 천수사 3층 석탑 관련 글도 적혀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전시되어 있다.

▲영천사 안내판이다. 연력이 적혀있다.


▲대웅전이다. 대웅전을 새로 지을때 광배가 4조각 나왔는데, 나머지 부분을 새로 만들어 완성품으로 경내에 설치했다. 스님한분이 수돗가에 앉아있는데 그 앞에 광배가 전시되어있다.

▲대웅전 삼존불상이다.

▲염불소리가 들려 스님이 예불 중이신 듯 하여, 30여분을 기다렸으나 예불이 계속되어, 조용하게 들어가서 합장기도하고, 삼존불상을 찍었다. 스님께 죄송하다.

▲삼성각이다. 삼성각은 잘 알다시피 토속신앙을 흡수한 불교사찰에 설치된 당우다. 내부에는 칠성신. 독성. 산신을 모시는 탱화가 대부분 있다.

▲삼성각 내부 칠성탱화이다. 칠성신을 그린 것이다.

▲나반존자이다. 나반존자는 스스로 도를 깨우치는 인물이다. 독성이라고도 한다.

▲산신도 이다. 산신을 그린 그림이다.

▲풍경이 요즘 새로 나온 것인지 이쁘다.

▲삼성각 현액이다.,

▲석불광배에 관련한 안내문이다. 광배는 불상뒤에 세우는 장식물이다.

▲광배는 총 4조각 2기가 나왔는데, 이를 원본처럼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1996년 대웅전을 다시 짓는 출토되었으며, 이 광배앞에 있던 석불상 2기 중 1 기는 국립춘천박물관에 있으며, 나머지 1기의 행방은 모른다. 사찰 땅속에 묻혔다는 말도 있다.

▲사찰 뒤편 언덕에 바위위에서 자라는 나무가 눈에 띈다.

▲주차장 옆 수풀에는 당우 지붕에 올리는 용마루 장식이 있다.

▲주차장으로 오르다보면 오른쪽 언덕 쪽으로 샘물터가 있다. 현재는 문을 만들어 닫았다. 바위틈에서 물이 나오는 듯하다. 맛이 달다고 한다. 지금은 너무 사용안해서 인지 주변에 이끼만 가득하다.

▲샘물에서 물이 차올러 흘러넘치면 여기로 오도록 장치를 해놨다고 한다. 여기는 우물터였다고 하나 현재는 폐쇄이다.

▲용마루 지붕이다,

▲소각장이다. 주로 영가의 옷가지나 물품을 소각한다.

▲소각장 옆으로는 석등과 연꽃 모양의 석조물이 있다.

▲사찰 입구 연못에는 연꽃이 가득하다. 아직 안 핀건지 꽃은 없다.

▲요사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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