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시설/사찰

한국의 사찰42- 충주 석종사

dogyein 2024. 7. 2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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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찰42- 충주 석종사

【개요】

●석종사는 충청북도 충주시 직동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이며, 금봉산(金鳳山)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 탑이 절에 있기는 하지만 고찰이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정식적인 건립은 1983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1984년 800평을 매입한 이후, 차츰 부지를 넓혀 2004년에 10만여평의 부지를 확보해 대가람이 세워졌다고 한다.

 

●이전에 있었다는 죽장사 또한 사찰명은 조선시대의 지리지 및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누군가 만들어낸 구전인 듯 하다. 현재 사찰안내도에는 죽장사라고 표기되어있긴 하다.

 

●석종사는 어쨌든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던 사찰의 자리로서, 폐사지로 남아 있던 곳에 승려 혜국이 주석하게 되면서 다시 사찰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건립과 관련한 스토리텔링이 있다.

 

●혜국이 봉암사에서 수행 중일 때 하얀 옷을 입은 승려가 나타나 “아이고, 중노릇이 시원찮으니 전생에 살았던 데도 모르는구먼!”이라고 하자, 이에 놀란 혜국이 “거기가 어디입니까?”라고 묻자 “죽장사도 몰라?”라고 대답하는 순간 눈앞에 사찰의 모습과 작은 탑이 보였다고 한다.

 

●혜국이 그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중원 땅 어딘가라면서 인연을 따라 아침에 떠나라고 하였다. 다음날 봉암사를 떠나 길을 걷던 도중 버스를 잡아타고 보니 충주로 향하던 버스였다.

●충주에 닿아 이곳저곳 땅을 알아보는 가운데 꿈속의 승려가 보여준 모습과 비슷한 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곳은 3년 전에 매물로 나왔으나 아직까지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혜국은 비구든 비구니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나 갈 곳이 없는 노인들과 함께 살게 되었고, 이들이 외로워하자 부모 없는 아이들을 모아 학교 공부를 시키면서 같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석종사의 대대적인 불사가 진행되었다. 이전에는 공원 지역으로 묶여 크게 중창할 수 없었으나 당시에 공원 지역 지정이 해제되었던 것이다.

●대웅전 창건을 시작으로 여러 불사가 진행되었는데, 불사는 혜국의 상좌들이 직접 중장비를 운전하고, 신도들이 힘을 합치는 등 많은 이들의 노력에 의해 진행되었다.

 

●중건당시 삼층만 남아있던 석탑은 오층석탑으로 복원됐고, 대웅전·선원·조실채·누각 등 일주문 등 모든 불사를 마무리해 현재 충주 일대에서 가장 큰 도량으로 거듭났다.

●석종사는 출가한 승려만을 위한 공간을 지양하고, 재가자(在家者) 역시 사찰에서 머물면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현재 템플스테이도 진행하고 있는데 약 3개층의 규모가 큰 건물로 사용할 만큼 이용자도 많은 듯하다.

 

●석종사는 대웅전과 오화각 및 범종각, 소소원(선방), 안양원, 금봉암, 조종육엽(조실채), 금봉선원, 감로각, 천척루(누각), 회명당(후원), 원흥료(종무소), 보월당(시민선원) 등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현재 있는 문화유산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65호인 『불설사십이장경(佛說四十二章經)』,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66호인 『인천안목 권상』, 충주시 유형문화재 제267호인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 권7~10 』관련항목 보기을 소장하고 있다.

 

●조선 말 숭유억불정책이 심할 때 조경로 충주목사가 당시에 있던 사찰을 헐어 충주시 문화원 건물인 청녕헌(충주관헌)을 지었다고 한다. 그 후 5층 석탑만이 홀로 이 터를 지켜오다가 일제시대에 완전히 폐사가 되었던 것을 1983년경 석종사 선원장이신 혜국스님이 과수원 800평을 사기 시작하여 현재 약 10만평의 터를 마련하게 되었다.

 

●현재 일주문 바로 아래는 여전히 사과밭등 과수원농장이 죽 이어져있다. 해마다 하안거와 동안거 결제 때에는 스님들을 위한 금봉선원과 재가불자들을 위한 보월선원에서 약 130명의 사부대중이 참선수행에 정진한다고한다.

 

【특징】

 

●석종사는 진입로에 접어들면 과수원과 간간이 나타나는 음식점. 카페들이 보인다. 점점 경사가 가파라져 산속으로 접어들어 오르다 보면 길죽하게 축대 밑으로 주차장이 보인다. 일주문 앞에 있는 이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일주문을 거쳐 200미터가량 오르면 경내가 나온다.

 

●중간에 화엄공원과 고려 3층 석탑을 볼 수 있다. 화엄공원은 마애불을 중심으로 법성게가 적힌 대형 바위들이 십 수개 타원형으로 세워져있다. 고려 3층 석탑은 일제 강점기 빼앗겼던 것을 90년만에 되찾았다고 한다.

 

●이 두 개를 보고 오르다보면 어느새 경내가 나온다. 아무래도 경사진 산에 짓다보니, 단층을 이용해 지어진 건물이 많다. 앞에서 보면 1층이 경내서 보면 지하층인 그런 형태이다.

 

●선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꽤 많은 스님들이 출가를 하거나 교리를 공부하는 것 같다. 나이어린 스님이 궂은일을 도맡아 움직이기도 하고,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가 크게 두 곳이 있는 것을 보면 규모가 꽤 큰 사찰인 듯하다,

 

●봄과 가을철에는 꽃과 단풍으로 단장을 하여, 찾는 이가 매우 많다고 한다. 그 계절에 한 번 더 와봐야 할 듯하다. 충북지역이 단풍이 유난히 이쁜 듯 하다.

 

●특이하게도 이 사찰에서는 부도가 안 보인다. 아무래도 역사가 짧아서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오래된 사찰은 당우는 사라져도, 부도는 대부분 있는데 이곳에는 하나도 안 보인다. 나이 어린 스님의 말에 따르면 산속에 있다고는 하지만, 출입금지 지역으로 통제되고 있다고 한다.

 

●동곡 일타스님, 수련 구산스님. 퇴옹 성철스님. 무영당 범룡스님 등이 큰 스님이라고 홈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는데 어떤 스님의 부도도 볼 수 없었다. 다녀본 사찰 중 부도나 비석을 한 개도 볼 수 없었던 유일한 사찰이다.

▲진입로에 세워진 석종사 표지석

▲일주문 앞에는 보통 사찰 표지석이있는데 여기는 '도방하' 라고 적힌 돌이 세워져있다. '도방하'라는 말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라는 의미입니다.' 방하착' 이라고 도 합니다.

▲일주문입니다. 금봉산석종사 라고 적혀있다.

▲사찰 안에서 본 일주문 이다.

▲일주문의 천정 단청이다.

▲일주문을 지나 오르다 보면 화엄공원마애석불 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안내판에는 법성게 해설이 있다.

▲법성게는 의상대사가 화엄경의 진리를 깨닭고 지은 글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을 210자로 요약해 놓은 것을 말한다. 정식 명칭은 화엄일승법계도 이다.

▲마애석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큰 돌에 법성게의 문구를 하나씩 적어놨다.

 

 

▲마애석불이다. 좌우로 석등이 하나씩 세워져있다.

▲마애석불서 조금 더 오르다 보면 고려삼층석탑 안내가 나온다. 일본에서 80년만에 돌아온 것이라고 적혀있다.

▲이 석탑또한 고려시대 이곳에 사찰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입구에 도달하면 주차장쪽에 안내도가 세워져있다.

▲안내도에는 석종사의 유래가 적혀있다.

▲범종각 입구에는 문구를 새겨놓은 석판이 하나있다.

▲산에서 흐르는 물줄기인지 큰 석조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석조 안에는 연꽃과 부레옥잠등 수생식물이 자라고 있어 운치가 더한다.

▲사찰을 들어서면 좌. 중앙. 우 측으로 오르는 길이 있는데 좌측으로 연못이 하나있다.

▲연못에는 연꽃이 두세송이 피어있다.

▲반대편에서 연못을 찍으니 훨씬 그림이 좋다. 포토 존으로도 손색없을 듯 하다.

▲사찰 입구쪽에서 오르는 길에 세갈래이다 보니, 이정표가 몇개 세워져있다.

▲중앙 계단으로 오르면 천척루 종무쪽을 통해 대웅전에 오를 수 있다.

▲오른쪽으로 오르다 보면 범종각을 만날 수 있다. 동강 선생이 현액을 썼다.

▲범종각 내부에 같이 있는 것이 바로 이 법고이다.

▲범종각 내부에 설치되어 있는 '운판'이다.

▲범종각 내부의 목어이다. 범종각 내부에 있는 모든 설치물은 두들기거나 치는 것이다. 목어는 소리가 나도록 속을 파내어 만든다.

▲범종각 전경이다.

▲범종이다. 대방광불화엄경 이라고 적혀있다.

▲보월당이다. 보살과 거사들이 생활하는 곳인 듯 하다.

▲금봉선원이다. 선원은 승려들이 교리를 공부하고 도를 닦는 곳이다. 불교대학을 만들어 강의가 진행되기도 한다.

▲금봉선원은 출입금지 구역으로 대문은 위에도 있다.

▲금봉선원 입구에는 '불이문' 현액이 있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천척문.

▲사찰 안에서 바라본 천척문.

▲천척루를 외부에서 본 전경

▲천척루 현액 또한 동강 선생님 글이다. 아마 이 사찰 모든 현액을 쓰신 듯하다.

▲소소원과 소소원 현액. 승려들이 거주하는 요사채이다.

▲감로각 전경이다. 특이하게 사찰 중간에 있다.▼감로각 내부 모양이다. 혼자 아무도 없을때 마셔야 복이온다고 한다.

▲안양원이다. 이 역시 요사채로 원주실이다. 요사채 두곳이 감로각을 중앙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아마도 분리하는 기준이 있을 것이다.

▲안양원 측면 사진과 현액

▲대웅전 이다. 계단 입구에 해태상이 세워져있다.

▲대웅전 안내판

 

▲대웅전 현액이다.

▲대웅전 내부의 모습

▲대웅전에서 내려다 본 전경

 

▲대웅전서 내려다 본 전경

 

▲대웅전 내부 징이다. 징 모양이 특이하다.

▲대웅전 내부 동종이다.

▲대웅전 내부의 탱화이다.

▲대웅전 지붕 '망와' 모양과 외벽 탱화이다.

▲대웅전 마당에 거북이 모양 석물이 있다.

▲역시 대웅전 앞 마당에 세워진 돌. 이것은 거북이와 달리 철제 보호막이 세워져있다. 인공 석물이 아닌 자연석물 같다.

▲대웅전 불상이다. 닫집이 모두 있다. 대웅전은 대부분 삼존불상이며, 모신 불상도 대부분 비슷하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 약사여래불. 우 아미타불이다.

▲소각장. 영가의 부속물들을 소각한다고 한다. 모양이 다른 사찰들과 전혀 다른 탑 모양이다.

▲오화각 전경

▲오화각이다. 다른 사찰의 삼성각. 산신각 과 같은 역할을 한다. 토속신앙을 흡수하여 사찰 내의 맨 뒤에 대부분 세운다. 오화각이라고 하는 이유는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백두산. 한라산의 맑은 기운이 모여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듯 하다.

▲오화각 내부의 탱화. 칠성도

▲오화각 내부의 산신도

▲산신각 내부의 독성도.

▲독성도는 안쪽으로 들어가야 있다. 산신령 같은 토속신앙과 구분하기 위함인가.

▲사찰의 좌측 언덕에는 약사여래불과 연등이 있다는 이정표가 있다.

▲오화각 옆으로 수풀에는 여러가지 석불과 동자승 굿즈들이 놓여있다.

▲언덕에 세워진 약사여래불상이다.

▲약사여래불에서 내려다 본 사찰

 

▲사찰의 경내로 계곡물이 두 세 개 정도 지나고 있다.

▲사찰의 규모답게 공양간 앞에는 장독이 많이 있다.

▲잠자리 나올 철인가. 지나다 앉아 쉬는 색시잠자리 한마리 발견

▲'조종육엽' 현액.... 조실채다. 주지스님이 거처하는 곳

▲조실채 전경

▲천척루와 연결되어 있는 종무소. 사찰에서 운영하는 해전장학회 사무실도 같이 있는듯하다,

▲석종사 5층 석탑이다. 이 석탑또한 고려시대에 사찰의 터임을 알려준다.

▲5층석탑 안내판

▲선림원- 템플스테이 하는 곳이다. 총 3층 규모이다.

▲선림원 현액

▲선다실이다.밑의 건물은 화장실 ㅠ

▲공양간이다. 마주친 스님 한 분이 친절하게 공양을 하고 가라고 했으나, 그냥 나왔다. 사찰 수십 군데를 돌면서 점심시간에 간 적이 많지만 공양하고 가라고 권유받은 곳은 이 사찰이 처음이다. 감사드린다.

▲일주문 쪽 주차장 말고 사찰 내부 템플스테이 하는 곳 쪽으로도 주차장이 넓게 있다. 방문객이 많지 않은 평일에는 사찰까지 올라와서 주차해도 된다. 일주문 안쪽으로도 너댓 군데의 주차장이 더 있다.

▲댱우와 길이 많아, 이정표가 몇개 세워져있다.

▲템플스테이 건물 옆에 '대방광불화엄경' 석물이 하나 서있다. 사찰 내부에 같은 글이 써진 석조물이 몇개 보인다.

▲영가들을 모신 곳이다.

▲사찰입구이다. 어느 곳으로 가도 경내로 갈수 있다,

▲석종사 내부 좌. 우로 계곡물이 경내를 통과해 흐른다.

 

                       ▲사찰 내로 흘러내리는 계곡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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